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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렌 목사의 시편 묵상3

관리자 2016-04-11 (월) 17:38 6년전 758  

7.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아들이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쓰러져버린 한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요. 그 어머니는 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아무도 만나려 들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이 와서 그 어머니 곁에 앉았습니다만 어머니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습니다. 천천히 목사님이 시편 23편을 들려주었고 그 어머니는 들었습니다.

목사님이 위로가 담긴 이 위대한 구절을 읊조리려고 하자, 그 어머니도 어느덧 함께 읊조리게 되었습니다. “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거닐지라도 해 받을 것을 두려워하지 아니함은 주께서 함께 하심이라.”

작은 웃음이 어머니의 입가에 떠올랐고 어머니는 말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 시편을 이제 달리 보게 되었습니다.”

헨리 베커(Henry Ward Beecher)는 이 시편 23편을 나이팅케일 시편이라고 했습니다. 나이팅게일이란 새는 밤이 아주 깊었을 때 아름답게 지저귑니다.

우리 모두에게 죽음은 가장 두려운 삶의 현실입니다. 장례식이 끝나자 누군가가 내게 말했습니다. “목사님은 장례식을 많이 치러 보셨죠? 장례식은 일상적인 일이 되었죠?” 그러나 내 대답은 아니오입니다. 우리는 결코 죽음에 익숙해질 수 없습니다. 죽음이란 모든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새로운 경험입니다.

아름다운 꽃이 있고 음악도 있습니다. 그러나 꽃도 음악도 무덤을 활기찬 곳으로 만들지는 못해요. 죽음은 우리를 두렵게 만듭니다. 우리를 힘없고 외로운 존재로 만듭니다.

물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실제로는 신체적인 죽음 경험 이상의 것을 뜻합니다. “어두운 골짜기라고도 번역되어 있습니다. 살면서 겪게되는 힘들고 두려운 때를 뜻합니다.

바스크(Basque:피레네 산맥 서부지방에 사는 사람들)의 양치기들은 팔레스틴에 실제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있다고 합니다. 이 골짜기는 예루살렘에서 사해로 이어지고 있는데, 산맥을 통과하는 아주 좁고 위험한 길이라고 합니다. 너무도 험하기 때문에 자칫하면 한 순간에 양이 떨어져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길이라는 거예요.

이 길은 사람들이 가려고 하지 않는 험악한 길입니다. 그러나 양은 두려워하지 않아요. 왜입니까? 목자가 그 길에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살다보면 억지로 가야하는 이런 어두운 곳에 이르게 됩니다. 죽음도 그중 하나이고, 실망도 그 중 하나이고, 외로움도 그 중 하나입니다. 그 외에도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나는 어두운 골짜기를 벗어나려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곳을 고요의 자리로 만들라고 말해줍니다. 잠시 전투를 멈추십시오. 많은 잡다한 일들을 잊으십시오. 잠시 동안 내일 그리고 내년 또 그 이후에 대해서 염려하는 조급함에서 벗어나십시오.

단지 멈추세요. 마음이 잔잔해지고 고요해집니다. 그러면 당신이 처한 어두운 골짜기한 복판에서, 이전에 느꼈던 그 어떤 것보다도 강하게, 낯설고 놀라운 한 임재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임재를 어둠 속에서 나이팅게일이 노래하는 것을 듣는 것 같은 느낌으로 체험했다고 내게 말해주었습니다.

내가 어디를 가건 두렵지 않으며 숱한 근심들이 절로 없어진다고 다윗은 말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임재하시면 능력이 생깁니다.

 

8.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지킨다

태풍으로 크게 다친 한 사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사고 이후로 그에게서 모든 삶의 기쁨이 사라졌습니다. 상처 때문이 아니라 또 다시 태풍이 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또 다른 태풍이 오리라는 것 때문에 그는 여전히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는데, 그것이 걱정거리였습니다. 한 날, 그의 아이들이 태풍 대피소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일이 다 끝나고 그가 대피소를 바라보자 안심이 되고 기뻤습니다. 이제 어떤 태풍이 와도 그는 안전합니다. 그 대피소가 그에게 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시편 23편에서 읽습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양이란 약한 동물입니다. 싸울 수 있는 무기가 없어요. 그래서 쉽게 들짐승들의 먹이가 됩니다. 두려운 일이지요.

그러나 목자는 지팡이를 가지고 다닙니다. 한 일 미터 오십 센티쯤 되는 무겁고 단단한 지팡이입니다. 다윗이 이 구절을 쓸 때 자기가 옛날에 가지고 있던 지팡이를 기억했을 겁니다. 사무엘 상서 17장에서 보면 다윗이 사울 왕에게 자기가 어떻게 사자와 곰을 쫓아내고 양떼를 지켰는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목자는 또한 막대기도 가지고 다닙니다. 한 이삼 미터쯤 되는 막대기입니다. 막대기의 끝은 갈고리처럼 구부러져 있고요. 팔레스틴 지역에 있는 많은 길들은 양쪽에 절벽들이 있습니다. 양이 발을 헛디뎌 아래로 미끄러지면 옆으로 삐죽 튀어나온 아래 바위에 양이 걸려있게 됩니다.

이때 목자는 막대기를 아래로 내려서 양의 작은 가슴 부분을 막대 끝의 갈고리로 걸어서 다시 끌어올립니다. 그래서 양은 본능적으로 목자의 지팡이와 막대기를 보면 위안을 얻습니다. 목자가 위기를 해결해줄 것이라고 알면 위안이 됩니다.

나는 자동차 보험을 들었습니다. 그 사실 때문에 마음이 든든합니다. 나는 우리 나라가 군사력을 유지하는데 너무나 많은 돈을 쓰기 때문에 마음이 아픕니다. 그러나 이 세계의 상태를 생각해보면 우리 나라의 군사력이 강하다는 점이 내게 안심을 줍니다.

내 인생에는 채워도 다 채울 수 없는 필요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도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이 말씀이 내게 위로가 됩니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3:20)

이 세상에는 악이 넘칩니다. 우리는 겁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여러 번 우리가 연약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러나 이 때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게 되면 위로를 얻게 됩니다.

물론 나는 하나님을 태풍 대피소나 보험처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제임스 몽고메리(James Montgomery)가 한 말로 내 생각을 대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 구원이시니, 어느 적을 두려워하리.

어둠과 유혹 속에서, 내 빛, 내 도움이 가까이 있으니,

수많은 군사들이 나를 에워싸도

나 굳건히 서서 싸우리.

어떤 폭력이 나를 놀라게 할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곁에 계서 내 오른손 잡아 주시니.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 - 이것이 수많은 공포와 우리 마음 가운데 있는 내일에 대한 두려움을 치워줍니다.

 

9. 주께서 내 원수의 눈앞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우리 식구가 살았던 한 읍에서 당구장 개업을 허가할지 말지를 두고 논쟁이 일어난 적이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당구장 개업에 결사 반대 하셨습니다. 누군가가 좀 농담을 섞어가며 우리 아버지께 당신도 당구 치고 싶은 마음이 있을 것이 아니냐 하고 물어본 것을 기억합니다.

아버지의 대답은 아니오이였습니다. 아버지는 아들들이 당구장에 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틀림없이 자녀들을 당구장에서 떼어놓으려고 하셨겠지요. 그러나 결국 당구장을 멀리 추방하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하셨습니다. 당구장 문제를 반대하실 때, 아버지는 다윗이 시편 23편의 이 구절을 쓴 의미와 같은 것을 느끼셨습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거룩한 땅의 풀밭에서 독초가 자랍니다. 그것을 뜯어먹으면 양은 죽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풀밭에는 뾰족한 가시가 있는 식물도 있습니다. 이것이 연약한 양의 코를 찔러서 양을 아프게도 합니다.

봄마다 목자는 곡괭이를 가지고 양을 괴롭히는 이 원수 같은 풀들을 파내서 모아 불태워야합니다. 그러면 들판은 양들이 안심하고 풀을 뜯어먹을 수 있는 곳이 됩니다. 시편 구절대로 풀밭에 밥상이 차려진 셈이지요. 눈앞에 있던 원수들이 다 끊어졌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일들을 끊임없이 우리의 자녀들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 우리 자녀들이 학교를 오갈 때 길 모퉁이에 한 여자 경찰이 서 있습니다. 그녀는 거기서 우리 자녀들을 지키는 거예요.

다행스럽게도 우리 아틀란타 주의 학교들에서는 자녀들이 마약을 먹는 따위의 심각한 일은 아직 없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시 당국이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계속 자녀들을 지켜주기를 바랍니다. 외설스런 문학뿐만이 아니라 삶을 파멸시키는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삶의 원수가 되는 것들과 끊임없이 싸워야 합니다.

농부가 씨를 심는 것만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아요. 계속 이랑을 다니며 잡초들을 뽑아주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이런 것들과 싸워주십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한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되요. 원수들과 싸워야 합니다.

최근 우리 아이들이 예방주사를 맞았습니다. 미리 병을 막아주는 의학이 참 고맙습니다. 부모, 과학, 정부, 사회 모두가 삶을 깨는 원수들을 무너뜨리고 대신 밥상을 차려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온갖 선한 삶들을 살찌울 수 있습니다.

인종 편견에 대한 설교를 마치고 나자 어느 선하게 생긴 사람이 복음을 설교하지 않았다며 나를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인종에 대한 편견과 잘못된 생각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여러 기회를 박탈해 가는 것을 나는 보아왔습니다. 나는 인종 편견에 대한 내 설교가 분명한 복음의 선포라고 믿습니다.

선한 것 언저리에 경건하게 앉아 있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아요. “하나님의 아들이 전투에 나가리.”하는 때들이 있는 겁니다.

이 구절에서 다른 뜻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다윗의 간청을 예수께서는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시고하는 기도로 표현하셨습니다. 평생 살다보면 무찔러야 될 원수가 많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살면서 앞으로 도움을 받지 못할까봐, 그래서 실패하고 있거나 실패할까봐서 걱정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목자께서 앞서 가십니다. 주께서 능력으로 우리를 지켜 주리라고 굳게 믿습니다. 이 믿음이 있을 때 세상을 이깁니다.(요일5:4)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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