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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일어나는 부활사건/부할절 둘 째주일 설교

관리자 2016-04-01 (금) 11:05 10년전 3944  

오늘 일어나는 부활사건

욥기19:23-27; 고린도전서15:1-11; 마가복음서16:1-8

 

부활절 둘째 주일 2016.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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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는 몹시 바빴습니다. 아주 기분 좋게 바빴습니다. 궁금하시죠? 인사를 주고받느라 그랬습니다. 교회 마당에는 목련이 꽃을 활짝 피웠습니다. 한강공원 둑방길을 따라 온통 개나리와 진달래가 피었고, 올림픽 파크텔 옆으로는 성급한 벚꽃도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했습니다. 아침 산책하며 만나는 꽃들마다 인사하느라 바빴습니다. 이 친구들을 일 년 만에 만난 셈입니다. 며칠 있으면 또 헤어져야 하기에 열심히 인사하고 다녔지요.

국회의원 선거유세가 시작되니, 후보들이 얼마나 열심히 인사하는지, 저 같은 사람이 뭐라고 그분들이 그렇게 활짝 웃으며 공손히 인사하는지, 이해는 잘 가지 않지만, 저도 열심히 인사 받았습니다. 아마 선거 끝나면 그런 일은 없겠지요? 그래서 이렇게 후보시절에 인사할 때 실컷 받아두어야지 하면서 여당 후보님의 인사도 열심히 받고, 야당 후보님들의 인사도 열심히 받아두었습니다.

 

기쁘게 인사하고 인사 받으면서 오늘 말씀들을 묵상할 때, 고린도후서 15장 6절의 말씀에 마음이 머물렀습니다. ‘역사의 현실과 신앙의 현실은 다르구나!’ 생각했습니다. 인사를 주고받으면서 그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저 후보님들의 인사는 일회적입니다. 그분이 있는 그 현장에서만 이루어집니다. 그분이 천호사거리에 있는데, 나는 인사동에 있다면, 나는 그분과 인사를 나눌 수가 없습니다.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물리적인 제약이 있기 때문이지요. 이것이 역사성이고, 역사의 한계입니다. 이 한계 때문에 우리 같은 사람은 만나고 싶어도 대통령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대통령님도 마음으로는 오천만 모든 국민을 다 만나서 악수하고 애로사항을 듣고 싶을 테지만, 다 만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의 현실은 다릅니다. 바울 사도의 이야기에 따르면, 무덤에 묻히셨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게바에게도 나타나고, 열 두 제자들에게도 나타나고, 그 다음에는 한꺼번에 오백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도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 구절은 시간과 장소를 달리하여 있는 수많은 신자들이 모두 부활생명을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신앙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부활경험은 시간과 공간이라고 하는 물리적 환경을 뛰어 넘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사건은 저 아프리카에 사는 부시맨 부족의 추장 뿌까뿌가 님에게도 일어날 수 있고, 여기 한국에 사는 아줌마 김얌전 여사에게도 동시에 일어날 수 있습니다. 또한 이천년 전 예수님과 함께 살았던 베드로와 제자들만이 아니라, 이천년이 지나서, 여기 있는 저와 여러분에게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역사현실에서는 아무리 내가 대통령님을 만났으면 좋겠다 간절히 희망해도 그렇게 될 수 없지만, 신앙의 현실에서는 내가 간절히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야지 희망하면 만날 수 있습니다. 더구나 나도, 너도 또 미래의 우리의 딸아들들도 만날 수가 있습니다. 때문에 신앙을 신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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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욥기의 새 생명에 대한 강렬한 의지와 희망과 신념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나의 살갗이 다 썩은 다음에라도, 내 육체가 다 썩은 다음에라도, 나는 하나님을 뵈올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겠다는 이 강력한 기대와 희망 속에서 기도하고, 감사하고, 찬양하며 사는 중에, 비록 당일에는 그리스도의 그 놀라운 부활생명을 만나지 못했지만, 제자들과 교회는 곧 이 엄청난 부활생명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고린도전서 15장인 부활장의 앞부분에서 바울이 말합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나타나시고, 다음에는 신도들에게 나타나시고, 그 다음에는 주님의 형제인 야고보에게도 나타나시고, 그 다음에는 모든 사도들에게 나타나시고, 그리고 맨 마지막에는 달이 차지 못하여 난 자와 같은 바울 자기에게도 나타나셨다고 합니다.

바울의 오늘 고백이 말하려는 바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주를 고백하고 따르는 그리스도인들 모두에게 나타나신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모든 제자들과 신자들은 다 새 생명을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8절과 9절이 이 부활사건을 더 극대화시켜 줍니다. 바울은 끝내는 달이 차지 못하여 난 자 같은 자기에게도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셨다고 합니다. “달이 차지 못하여 난 자 같다”는 말을 공동번역 성서는 ‘팔삭둥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어 원래 뜻은 “조산아”란 뜻입니다. 실제로 바울이 조산아란 말이 아닙니다. 그만큼 미숙하고, 자격이 없는 불완전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가톨릭 200주년 주석 성경은 타고난 장애인같은 나에게도 라고 옮겨놓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는 그를 간절히 기대하고 믿으며, 날마다 모여 떡을 떼고 주의 뜻을 수행하는 교회의 모든 신자들에게 나타났을 뿐 아니라, 뱃속에서부터 지체자같은 자기, 곧 예수를 욕하고, 복음을 능멸하고, 그리스도를 박해하는 데 앞장 선 죄인의 괴수에게도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 증언으로, 한 주간 인사 나누는 기쁨은 물론, 오늘 부활신앙에 대한 희망찬 증언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제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셨다”고 하는 교리를 되뇌는 일은 접어 두십시오. 예수께서 다시 사신 것처럼, 예수께서 새 생명으로 일어나신 것처럼, ‘지금 내 곤경을 기쁜 처지로 바꾸겠다. 내 아픈 몸, 건강한 몸이 되겠다. 내 무너진 경제 다시 세우겠다. 이 상처만 주는 거친 성격 이겨내고 사랑의 인품으로 거듭나겠다. 이 입술만 있는 신앙을 진실한 몸 신앙으로 가꾸겠다.’ 이렇게 강력히 소망하고, 확신하십시오. 그리고 끊임없이 기도하고, 예배하고, 주님의 뜻을 행하는 성령의 삶을 사십시오. 그러면 바로 오늘 내게도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신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한 단어를 더 깊이 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4절에 보면, 성경의 기록대로 그리스도께서 무덤에 묻히셨다가 사흗날에 살아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마치 예수께서 스스로 일어나고, 살아나신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정확한 번역은 사흗날에 그리스도는 “일으켜지셨다”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예수를 일으키셨다, 살리셨다는 뜻입니다. 그 누구든 반드시 하나님의 생명을 입겠다고 기대하고 확신하며, 성령의 뜻 가운데 진실하게 생활을 해가면, 반드시 하나님은 예수를 일으킨 것처럼, 그 사람을 일으키신다는 그 믿음을 또 그 체험을 바울 사도는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날마다, 아침마다, 일어나면 우리가 늘 새사람이 되어서 감사한 이유가 있습니다. 또 어제 일은 다 잊고 사랑으로 하루를 새로 사는 이유를 이제 알 수가 있습니다. 바울처럼 배냇바보보다도 못한 내게도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나타나셨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리스도를 일으킨 것처럼, 하나님은 날마다 나를 새 존재로, 희망의 존재로 오뚜기처럼 일으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부활신앙입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의 증언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증언 속에서 감히 비판거리도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증언을 제대로 경험하기도 했지만, 좀 왜곡되게 그것을 전하는 것 같습니다. 바울이 가장 형편없는 자기에게도 부활주님이 나타나셨다는 것은 옳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너무 남성중심, 사도중심의 부활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 대표가 6절입니다. 우리말 성경과 현대어 성경들은 오늘날의 시대가치를 반영해서, 주님이 ‘형제자매들’에게 나타나셨다고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리스어에는 형제들에게 나타났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시대 문화와 의식의 한계 때문이겠지만, ‘베드로 - 열두 사도 - 500형제 - 야고보 - 모든 신도’는 이른바 교권과 가부장중심입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오늘 마가복음서 따르면, 마가는 이 모두를 한 번에 바로잡고 있습니다. 원래 마가복음서는 16장 8절이 그 끝입니다. 마가복음서에 따르면, 베드로는 예수님이 붙잡혀 심문당할 때, 예수를 부정한 정말 비겁한 인간입니다. 예수님의 남자 제자들이 다 그랬습니다. 마지막 까지 예수님을 따르고 지키고, 빈 무덤에 가서 거기서 주님을 만난 이들은 여자들입니다. 그 중에는 창녀였던 여인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여인네들이 빈 무덤에서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듣고 놀라고 떨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가장 절망스런 삶을 사는 존재들, 연약한 존재들, 병든 존재들이 희망 속에서 끝까지, 무덤까지, 예수를 따를 때, 그들에게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나타나신다는 체험의 증언입니다.

 

부활절 둘 째 주일에 듣는 희망의 말씀입니다. 저 여인들처럼, 예수께서 묻힌 그 자리까지도 따라 갈 때, 오늘 우리와 우리 역사와 이 인류 세계도 다시 살아납니다. 하나님께서 손을 잡아 다시 일으켜 세워주시는 놀라운 새 생명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

지난 주 부활절 설교를 준비하며, 저는 한없는 절망을 경험했습니다. 고난주간에 묵상을 하며, 전쟁의 위기로만 치닫는 이 겨레 현실과 세속주의 나락으로 떨어진 교회, 그리고 감히 감당할 수 없는 나 같은 존재가 복음을 증언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큰 절망감이 들었습니다. 갑자기 2-3년 전에, 역시 거룩한 주간에 절망감에 젖었을 때, 힘든 몸을 추슬러서 갔던 서울 장수마을이 생각났습니다. 이 마을은 한성대와 서울 성곽 사이를 내려가며 있는 달동네입니다. 개발로 개발로 쫓겨나서 언덕배기에 다 쓰러지는 집에 사는 절망의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재개발을 여기저기 추진했습니다. 이곳마저 재개발이 되면 이들은 이제는 죽어야지 갈 곳이 없습니다. 무기력, 좌절, 포기, 불안… 이것이 그들의 운명이었습니다.

한날 한성대에서 미술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이 죽음의 동네 벽에 벽화를 그렸습니다. 냄새나고, 무너져가고, 온통 썩어가는 곳에 그려진 한 점의 그림! 놀랍게도 그 한 점의 그림이 동네 사람들의 죽은 영혼을 깨웠습니다. 비록 집은 더럽지만 학생들과 더불어 집 담장에 꽃 그림, 바다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러면서 소문이 나서 장수마을, 벽화마을로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갔을 때의 실상은 소문난 것과는 달리, 전체가 아니라 일부에만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놀라운 징조를 그 동네 게시판과 회보에서 확인했습니다. 이 마을은 마지못해 사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니라 창조공동체가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마을 주민 스스로 조합을 만들어 당장 무너지는 집들을 수리하며, 그 인건비로 생활도 하고, 집도 단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쓰레기며, 환경문제를 위해 온 주민이 함께 모여 해결책을 하나씩 마련했습니다. 그러면서 만든 문구가 있습니다. “다섯 명이 모이면 골목을 바꿀 수가 있습니다.” 이 장수 마을은 그 때는 10%였지만, 분명 90% 놀라운 변신을 했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가보고 싶습니다.

‘그렇구나, 바로 이것이 실제 생활 속의 부활이구나! 그리고 누가 이 부활을 일으키는가? 예수를 일으킨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부활의 조건과 준비는 무엇인가? 누군가 강력하게 새 생명을 기대하고, 소망하면서, 그 시꺼먼 담장에 예쁜 꽃을 그린 그 사람을 통해서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교회의 선교문제도 부활의 눈으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신앙의 차원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결코 이천 년 전 그 한 번의 사건이 아닙니다. 새 생명으로 되살기를 강력히 희망하며, 성령안에서 진실되게 사는 모든 이가 경험하는 사건이 부활사건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선교문제, 복음증언 문제를 부활신앙으로 생각해 봅시다. 인생이 되었든, 망가진 동네나 역사가 되었든, 죽은 그곳 마당에 꽃한송이를 심거나 담장에 예쁜 그림 하나를 그린다면, 당신은 죽은 이를 살리는 성부 하나님의 그 위대한 부활사역에 동참하는 것이고, 이로서 당신은 거룩한 이가 되는 것입니다. 이 아침 부활생명을 만난 우리는 또한 부활생명을 일으키는 사역자입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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