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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 밖으로 탈출하라!

관리자 2016-03-25 (금) 07:06 10년전 3794  

(‘삼위일체력’의 ‘주일성서일과’에 따른 것입니다. 삼위일체력은 신학마당 1번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무덤 밖으로 탈출하라!

 

욥기19:23-27. 고린도전서15:1-11(3-9). 마가복음서15:42-16:8

부활주일 2016. 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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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그리스도교의 토대는 부활신앙입니다. 이 부활신앙이 아니었다면, 그리스도교는 탄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받아서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제일 먼저 전해준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성경말씀대로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사셨다는 것이라고 증언했습니다. 바울은 복음의 내용을 ‘그리스도의 부활’이라고 전해줍니다.

공관복음서마다 복음에 대한 선언이 좀 다르지만, 복음은 ‘기쁜 소식’으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현재의 낡고, 죄 되고, 불의한 인간성과 사회구조를 회개하고, 180도 돌이켜, 자기와 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정의로운 다스림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선포하신 이 복음으로 교회가 탄생하고, 그 교회를 통해서 오늘날 우리에게도 하나님 나라 복음이 전해지게 된 것은 바로 그 핵심에 강력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체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2000년 동안 이 복음이 우리 인간성과 세계를 끊임없이 변혁해 온 것입니다. 이 때문에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도 복음이라고 하면서 부활을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으로 전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은총의 생명에 참여하려면 우리는 부활신앙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에게 까지 계속되는 부활체험에 대해 이렇게 들려줍니다.

 

“나는 내가 전해 받은 가장 중요한 것을 여러분에게 전해 드렸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성서에 기록된 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는 것과 무덤에 묻히셨다는 것과 성서에 기록된 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과 그 후 여러 사람에게 나타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베드로에게 나타나신 뒤에 다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또 한번에 오백 명이 넘는 교우들에게도 나타나셨는데 그 중에는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도 있지만 대다수는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그 뒤에 야고보에게 나타나시고 또 모든 사도들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팔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나는 사도들 중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이요 하느님의 교회까지 박해한 사람이니 실상 사도라고 불릴 자격도 없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이 베드로-열두 사도-오백신도-주님의 동생 야고보- 모든 사도로 확대되며 이어집니다. 그리고는 교회를 박해한 죄인의 괴수였던 바울에게도 이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곧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모든 시대, 모든 사람이 늘 부활하신 구주를 만난다는 증언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 부활신앙이 오늘 우리에게 까지 전수되어서 이 아침 우리는 죽음을 이기시고 무덤에서 생명의 자리로 나오신 그리스도를 찬미하는 장엄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부활신앙의 정체, 곧 그리스도의 부활경험을 말하려면 우리는 여러 곤란한 문제에 빠지게 됩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이 생각하듯이 예수님의 부활은 죽은 시체가 다시 살아나는 그런 사건은 아닙니다. 성경 그 어디에도 우리 주 예수님과 그리스도인의 부활을 생시처럼 몸을 입고 다시 사는 것이라고는 결코 전하지 않습니다.

만일에 죽었다가 생전처럼 다시 사는 것이 부활이라면, 저는 너무 싫습니다. 차라리 부활을 거부하렵니다. 못생기고 지질한 지금 모습으로 돌아오라니요. 혹시 장동건씨나 조인성씨 같은 멋지고 잘난 모습으로 바뀌어서 살아난다면 모를까 말입니다. 한 주간 『내가 믿는 부활』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의 원로 신학자들이 전하는 부활신앙에 대한 내용인데, 새 생명을 얻은 체험의 이야기라기보다는 다 그저 자신의 부활에 대한 신학적인 이해를 말한 것뿐이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부활신앙은 이것이 부활이다 저것이 부활이다 하면서 어떤 신학적이고 교리적인 논쟁을 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언어를 넘어서는, 말 할 수 없는, 하나님 체험의 놀라운 사건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는 ‘부활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어떤 때 부활생명을 체험하느냐’를 성서의 증언에서 들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관념이 아니라 부활체험의 삶의 현장을 나눔으로써 그리스도교 부활신앙의 본질을 만나보려고 합니다. 오늘 마가복음서의 부활증언은 그리스도인의 부활체험의 생생한 현장과 의미를 날카롭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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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따르던 세 여인이 안식일 다음날, 장례도 못 치른 예수의 시신을 닦아드리려고 무덤에 갔습니다. 이 무덤에서 저들은 뜻밖에도 부활체험을 합니다. 무덤에 나타난 흰 옷 입은 사람이 여인들에게 전한 말은 ‘십자가에 못 박힌 나사렛 사람은 여기 무덤에서 찾지 말라. 그는 살아났다. 여기에 없다. 보라. 이 무덤은 비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소식을 갈릴리의 제자들에게 가서 전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여인들은 뛰쳐나와 무덤에서 도망쳤고, 벌벌 떨면서 넋을 잃었고, 무서워서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못했다고 합니다. 원래의 마가복음서는 여기서(8절에서) 끝이 납니다. 성서신학자들은 무서워서 떨며 도망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어색하기 때문에 훗날 9절부터 20절을 첨가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끝부분을 깊이 묵상하면서, 원래 마가복음서가 8절에서 끝난 것은 어색하지 않고 정말로 완벽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영어성경과 우리 말 성경을 종합해보면, 8절을 이렇게 옮겨놓았습니다. “여자들이 무덤에서 도망쳤다. 여자들은 벌벌 떨고 겁에 질렸다. 무서워서 아무 말도 못했다”(공동번역)라고 되어있습니다. 이렇게 끝이 나서 마가복음의 결말이 어색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8절을 새로이 읽어 봅니다. 먼저 여인들이 벌벌 떨고 겁에 질렸다는 헬라어 ‘엑시타시스’는, 영어로 엑스타시(ecstasy)인데, ‘무아경, 황홀’이란 뜻이 있습니다. 물론 ‘제정신이 아니다’ ‘당황하다’는 뜻으로도 쓰입니다. 우리는 무서워도 벌벌 떨거나 제정신이 없게 되기도 하지만, 황홀경과 극치의 기쁨에 빠져도 몸을 떨고, 제정신이 아니게 됩니다. 그리고 황홀하다는 말의 어원을 분해하면 ‘ex(〜의 밖에)+stance(자리, 입장)’으로, 어떤 곳-장소든, 사상이든, 그 무엇이든 지금의 것에서-에서 빠져 나올 때 경험하는 신비와 황홀입니다. 지금의 삶이나 자리에서 빠져나와 그곳의 밖에 머물 때, 지금의 삶이나 자리에 저항해서 다른 삶과 자리에 진입할 때, 우리는 진정한 환희와 기쁨을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엑시타시란 말을 썼으므로 이 여인들은 황홀하여 떨었다고 옮길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여인들이 무서워서 아무 말도 못했다고 했는데, 여기 무섭다는 헬라어 단어 ‘포보스’는 무섭다는 말 외에도 ‘경외, 숭배’라는 뜻이 같이 있습니다. 경외나 숭배는 끔직한 경우를 당한 무서움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여인들은 경외감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아무 말도 말을 할 수 없었다고 풀이해도 좋을 것입니다.

여인들은 극치의 황홀로 온 몸을 떨었고, 경외감 때문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이른바 ‘거룩 체험’입니다. 루돌프 오토(Rudolf Otto, 1869-1937)라고 하는 종교학자가 『거룩함의 의미』라는 귀중한 책을 썼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종교 감정인 거룩 또는 성스러움을 체험할 때를 분석한 것으로 종교학의 고전 중의 고전이 되었습니다. 모세처럼, 엘리야처럼,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하나님을 만날 때를 인간은 거룩 체험을 합니다. 이 거룩을 체험할 때 인간은 두 감정을 동시에 강렬히 느낍니다. 그것은 ‘황홀’과 ‘두려움’입니다. 이 황홀은 하나님과 하나 되는 감정입니다. 사랑하는 부부가 한 몸 될 때 맛보는 그것입니다. 두려움은 하나님은 우리와는 차원이 다른 범접할 수 없는 분임을 아는 감정입니다. 이 두 감정이 하나님을 체험할 때 엉켜 있습니다.

이 오토의 견해에 따르면 무덤에서 이 여인들은 거룩 체험, 성스러움을 체험을 한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생명경험을 한 것입니다. 그 때문에 황홀해서 몸을 떨고, 경외감에 사로 잡혀 말을 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 해석을 마태복음서가 뒷받침합니다. 마가복음서를 기초로 자기 나름대로 복음서를 쓴 마태는 여인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이 엇갈려서, 급히 무덤을 떠나, 이 소식을 전하러 제자들에게 달려갔다”(28:8)고 합니다.

이렇게 해석할 때, 이 여인들은 무덤에서 도망친 것이 아닙니다. ‘도망치다’라고 옮긴 헬라어 단어 ‘퓨고’(φευγω)에는 ‘빠져나가다, 탈출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영어 번역은 “그녀들은 무덤에서 나와 달려갔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새번역 성경의 “그들은 뛰쳐나와, 무덤에서 도망하였다”를 “그들은 무덤을 탈출해서 달렸다. 또는 무덤에서 빠져나와 뛰었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서는 무섭다는 단어로 ‘포보스’를 썼고 기쁨이란 단어로는 ‘카라’를 썼습니다. ‘포보스’는 경외감의 두려움을 뜻하고, ‘카라’는 희열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8절을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여인들은 무덤에서 빠져나와 달려갔다. 여인들은 너무도 황홀해서 정신을 잃었다. 여인들은 경외감에 사로 잡혀서 그 누구에게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오늘 마가복음서의 말씀에서 여인들이 첫 체험한 부활신앙이 무엇인지 그 정체를 알게 됩니다. 무엇보다 ‘언제 부활하신 예수를 체험하는가?’ 하는 ‘그 때와 자리’를 알게 됩니다. 여인들은 예수를 만나러 무덤에 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무덤, 곧 죽음의 자리’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그는 살아있기 때문에 무덤에 없다. 죽음의 장소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이제 여인들은 삶의 자리, 곧 생명의 자리에서 그분을 찾고 만나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자는 무덤이 아니라 생명의 자리에 예수가 있다는 말을 제자들에게 전하라고 합니다.

여인들은 빈 무덤의 신비를 공안으로 깨치듯 깨쳤습니다. ‘무덤이 아니라 생명의 자리로 가야만 예수를 만난다! 예수는 무덤을 벗어났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의 지금 이 무덤, 이 죽음의 자리, 이 죽음의 세계, 이 죽음의 삶을 탈출하자, 벗어나자, 빠져나가자!’

이것을 깨닫고 여인들이 무덤을 탈출해서, 생명의 자리로 뛰어갈 때, 그때 여인들은 황홀과 경외로 온 몸을 떨었습니다. 곧 다시 사신 그리스도를 체험하며 거룩한 경지에 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마가복음서가 증언하는 부활체험이고, 우리가 믿고 받아들이는 부활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16장 8절로 끝이 나는 마가복음은 어색한 것이 아니라 정말 멋지게 그 끝을 맺고 있는 것입니다.

 

같이 읽은 히브리 성서에서 욥은 부활신앙 앞에 있는 사람입니다. 욥은 한 순간 재물과 아름다운 자식들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더욱이 말할 수 없는 질병에 걸렸습니다. 아내는 물론 친구들도 욥을 저주받았다고 하고 욥 스스로도 자기를 저주하며 하나님을 부인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욥은 무덤인 죽음의 자리에 있습니다. 그러나 욥은 발버둥을 칩니다. 하나님을 만날 강력한 희망을 말합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가 살아 계심을… 내 살같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내 몸으로 하나님을 보리라….”

 

오늘 아침에 선포합니다. 희망이라는 믿음을 여러분에게 부활신앙으로 선포합니다. 지금의 무덤의 자리에서 벗어나서 생명의 자리에서 그분을 찾기 위해 힘차게 뛰어 갈 때<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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