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9월 27일 / 창조절 넷째 주일
욥기 37:23-24
하나님의 권능이 가장 크시니, 우리가 전능하신 그분께 가까이 나아갈 수 없습니다. 사람을 대하실 때에, 의롭게 대하시고, 정의롭게 대하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는 사람을 무시하십니다.
로마서 9:19-26
그러면 그대는 내게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책망하시는가? 누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수 있다는 말인가?” 오, 사람, 그대가 무엇이기에 하나님께 감히 말대답을 합니까? 만들어진 것이 만드신 분에게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하고 말할 수 있습니까? 토기장이에게, 흙 한 덩이를 둘로 나누어서, 하나는 귀한 데 쓸 그릇을 만들고, 하나는 천한 데 쓸 그릇을 만들 권리가 없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하신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심을 보이시고 권능을 알리시기를 원하시면서도, 멸망받게 되어 있는 진노의 대상들에 대하여 꾸준히 참으시면서 너그럽게 대해 주시고, 영광을 받도록 예비하신 자비의 대상들에 대하여 자기의 풍성하신 영광을 알리시고자 하셨더라도, 어떻다는 말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되, 유대 사람 가운데서만이 아니라, 이방 사람 가운데서도 부르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호세아의 글 속에서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나는, 내 백성이 아닌 사람을 ‘내 백성’이라고 하겠다. 내가 사랑하지 않던 백성을 ‘사랑하는 백성’이라고 하겠다.”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다’ 하고 말씀하신 그 곳에서, 그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자녀라고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마태복음서 14:22-33
이른 새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로 가셨다. 제자들이,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서 “유령이다!” 하며 두려워서 소리를 질렀다. 예수께서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심하여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이시면, 나더러 물 위로 걸어서, 주님께로 오라고 명령하십시오.” 예수께서 “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갔다. 그러나 베드로는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보고,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물에 빠져 들어가게 되었다. 그 때에 그는 “주님, 살려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예수께서 곧 손을 내밀어서, 그를 붙잡고 말씀하셨다. “믿음의 적은 사람아, 왜 의심하였느냐?” 그리고 그들이 함께 배에 오르니, 바람이 그쳤다.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은 그에게 무릎을 꿇고 말하였다. “선생님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 참된 지혜를 얻는 사람 ]
1. 참된 지혜의 자리
오늘 말씀의 제목은 참된 지혜를 얻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종종 지혜를 내가 아는 힘으로 오해합니다. 무엇이든 설명할 수 있고, 예측할 수 있고, 통제할 수 있을 때 자신이 지혜롭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삶이 계획대로 흘러갈 때는 마음이 평안하지만, 이해되지 않는 사건이 찾아오면 곧 흔들립니다.
오늘 세 본문은 지혜의 기준을 다시 세워줍니다. 참된 지혜는 모든 것을 다 아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차이를 인정하고, 내가 알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겸손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주권과 자비를 받아들일 때 지혜는 더 깊어지고, 두려움 속에서도 “주님, 살려 주십시오”라고 부르짖을 때 지혜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참된 지혜는 내가 다 알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2. 겸손과 경외
욥기는 고난을 통하여 지혜에 이르는 길을 보여 주는 지혜서입니다. 의로운 사람 욥은 이유를 다 알 수 없는 고난을 겪습니다. 재산을 잃고, 자녀들을 잃고, 자신의 몸까지 병들게 됩니다. 욥은 왜 이런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자 욥의 친구들이 찾아옵니다. 처음에는 아무 말 없이 욥 곁에 앉아 있었지만, 곧 고난의 원인을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어떤 이는 인과응보의 원리를 적용하고, 어떤 이는 욥에게 숨겨진 죄가 있기 때문이라고 단정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변호하려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고난받는 욥을 더욱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욥과 세 친구의 긴 논쟁이 끝난 뒤에 등장한 엘리후의 말 가운데 마지막 부분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엘리후의 말이 욥기의 최종적인 대답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엘리후 역시 욥의 고난을 바라보며 해석하고 말하는 한 사람입니다. 그의 말이 끝난 뒤에야 하나님께서 직접 폭풍 가운데서 욥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엘리후의 말을 가지고 “욥이 왜 고난을 받았는가”를 다 설명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엘리후의 마지막 말이 우리에게 알려 주는 중요한 내용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인간에게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엘리후는 말합니다. “하나님의 권능이 가장 크시니, 우리가 전능하신 그분께 가까이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으로 다 파악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논리와 경험과 지식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엘리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는 사람을 무시하십니다.” 이 말은 욥기 전체에 흐르는 지혜의 고백과도 연결됩니다. 욥기 28장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요, 악을 멀리하는 것이 슬기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엘리후가 욥의 문제를 해결했다”라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설명이 멈추는 자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욥도, 친구들도, 엘리후도 하나님을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기 시작하십니다.
이것이 참된 지혜를 생각할 때 매우 중요합니다. 지혜는 모든 질문에 답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내가 더 이상 설명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는 것이 지혜입니다. 우리도 원인과 결과로 세상을 이해하는 데 익숙합니다. 인과관계는 인간 문명을 발전시킨 중요한 지식의 방식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인과응보나 권선징악만으로 다 설명되지 않습니다. 선한 사람이 고통을 겪고, 악한 사람이 형통해 보이는 순간이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찾을 수 없는 상실과 고난이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두 가지 극단으로 가기 쉽습니다. 하나는 어떻게든 이유를 만들어 내어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태도입니다. 다른 하나는 아무 의미도 없다고 생각하며 냉소와 절망에 빠지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욥기는 다른 길을 보여 줍니다. “나는 다 알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이 고백입니다. 지혜는 내가 다 알아냈다는 자부심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내가 다 알 수 없다는 겸손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그 겸손은 체념이나 절망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현실의 무게를 외면하지 않습니다. 질문을 억지로 무시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 질문과 현실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도록 내버려두지도 않습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며, 현실보다 하나님이 더 크시다는 것을 믿습니다. (내 삶에서 이해되지 않는 위기가 다가왔을 때 어떻게 이해하고 반응했는가?)
3. 질그릇에 담긴 지혜
로마서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사람이 하나님께 따지듯이 묻는, 질문 하나를 제시합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책망하시는가? 누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 질문에는 인간이 쉽게 빠져드는 유혹이 담겨 있습니다. 질문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 묻고, 따지고, 탄식하는 기도가 많이 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내가 판단하는 재판정에 세우고, 피조물이 창조주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태도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토기장이와 그릇의 비유를 들어 설명합니다. “만들어진 것이 만드신 분에게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하고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토기장이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손에 있는 그릇입니다. 이 비유는 무엇보다 관계를 바로 세우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만들어 낸 분이 아니라, 우리를 만드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는 하나님을 내가 평가하고 판단하려는 태도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누구인가를 깨닫는 데서 지혜가 시작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을 차갑고 무서운 운명처럼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바울 사도가 이 말씀을 하는 전체적인 맥락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원 문제가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 후반에서 하나님의 주권은 놀라운 자비로 나타납니다. “나는, 내 백성이 아닌 사람을 ‘내 백성’이라고 하겠다. 내가 사랑하지 않던 백성을 ‘사랑하는 백성’이라고 하겠다.” 또 말합니다.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다’ 하고 말씀하신 그 곳에서, 그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자녀라고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사람들은 경계의 선을 긋습니다. 누가 안에 있고 누가 밖에 있는지를 판단합니다. 누가 하나님의 백성이고 누가 그렇지 않은지를 쉽게 결정하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는 인간이 그어 놓은 경계를 넘어갑니다. 내 백성이 아니라고 여겨졌던 사람을 ‘내 백성’이라고 부르시고, 사랑받지 못한다고 여겨졌던 사람을 ‘사랑하는 백성’이라고 부르십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사람을 함부로 배제하기 위한 권력이 아니라,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범위까지 자비를 넓혀 가시는 자유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지혜는 내 기준으로 하나님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보다 크시며 하나님의 자비가 내 생각보다 넓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그릇과 같습니다. 내가 기대했던 것이 담겨 있을 수도 있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 담겨 있을 수도 있습니다. 내가 원했던 것이 그릇에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다른 사람의 그릇을 바라보며 비교합니다. “왜 저 삶에게는 있고 나에게는 없는가?” “왜 내 삶은 내가 원하던 모습과 다른가?” 그러나 이런 비교는 내 인생의 그릇에 담겨 있는 소중한 것을 바라보지 못하게 합니다. 참된 지혜는 하나님이 내 삶에 담아 주신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은혜로 받아들이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이 주지 않으신 것을 억지로 가지려는 욕망에서 조금씩 자유로워지고, 나에게 맡겨진 삶을 감사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다른 사람의 삶도 하나님의 자비 안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되고, 하나님의 구원이 나의 계산과 경계를 넘어 이웃과 온 세계를 향해 넓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내 인생의 그릇에 무엇을 담아 주셨다고 느끼는가?)
4. 바람 앞에서 드러나는 지혜
마태복음서는 풍랑의 현장으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제자들은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고 있었습니다. 거센 바람이 불고 파도가 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두려워하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안심하여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예수님은 풍랑을 잠재우기 전에 먼저 제자들의 마음을 붙드십니다. 믿음의 위기에서 먼저 흔들리는 것인 환경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베드로가 말합니다. “주님, 주님이시면, 나더러 물 위로 걸어서 주님께로 오라고 명령하십시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오너라.”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로 갑니다. 그는 믿음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위험한 상황에서도 주님의 말씀을 믿고 발을 내디뎠습니다. 그런데 곧 거센 바람을 봅니다. 그러자 두려움이 밀려왔고, 그는 물에 빠져들기 시작합니다. 한편으로는 주님을 바라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의 위험을 바라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적은 사람아, 왜 의심하였느냐?” 여기서 의심은 단순히 하나님이 계시는지 안 계시는지를 머리로 의심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두 방향으로 갈라지는 상태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면서 동시에 바람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결국 물에 빠져들며 외칩니다. “주님, 살려 주십시오” 아마 이 짧은 말이 오늘 세 본문 가운데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중요한 지혜의 말일 것입니다. 베드로는 풍랑ㅇ르 분석하지 않습니다. 물이 왜 이렇게 거칠어졌는지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자신의 믿음을 증명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외칩니다. “주님, 살려 주십시오” 그때 주님께서 곧 손을 내밀어 베드로를 붙잡으십니다. 베드로가 살아난 것은 그의 의지가 강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믿음이 완벽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흔들리고 의심하면서도, 마지막 순간에 누구를 불러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참된 지혜는 모든 폭풍의 원인을 다 분석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순간에 누구에게 부르짖어야 하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람을 바라보면서 가라앉을 때도, 주님의 손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님, 살려 주십시오”라고 부르짖을 때, 주님은 손을 내밀어 붙드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베드로가 함께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칩니다.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은 예수님께 무릎을 꿇으며 고백합니다. “선생님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풍랑 이야기는 바람이 그쳤다는 말로 끝나지 않습니다. 신앙고백으로 마무리됩니다. 참된 지혜는 시련이 없는 삶을 만드는 데 있지 않습니다. 시련 속에서 내가 얼마나 강한지를 증명하는 데도 있지 않습니다. 시련을 통하여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더 깊이 알아가는 데 있습니다. (내 마음을 흔드는 바람은 무엇인가?)
5. 참된 지혜를 얻는 사람
다 알 수 없을 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내게 주어진 ᅟᅥᆺ을 은혜로 받아들이는 것, 두려움 속에서 주님께 부르짖는 것. 이것이 믿음의 지혜입니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손에 있는 그릇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배가 풍랑을 만날 때에도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안심하여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을 알고 있기 때문에 믿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알 수 없는 순간에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주어진 삶을 은혜로 받아들이며, 바람이 거세게 불 때에도 주님을 향해 부르짖기 때문에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길에서 우리는 주금씩 깨닫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누구이신지를.
(성찰) 내 인생의 그릇에 담긴 선물은 무엇인가?
(응답) 의심을 버리고 주님만 바라보겠습니다.
함께 드리는 기도
창조주 하나님, 우리가 알 수 없는 일 앞에서 교만하거나 절망하지 않게 하시고, 경외하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서게 해주십시오. 토기장이 되신 주님께서 우리 삶의 그릇에 담아 주신 모든 것을 선물로 받아들이는 믿음을 주십시오.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 순간마다 ‘주님, 살려 주십시오’라고 부르짖게 하시고, 주님의 손이 우리를 붙드신다는 확신으로 다시 일어서게 해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