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7월 12일 / 성령강림 후 일곱째 주일(여섯째 주일)
요나서 3:10-4:11
하나님께서 그들이 뉘우치는 것, 곧 그들이 저마다 자기가 가던 나쁜 길에서 돌이키는 것을 보시고, 뜻을 돌이켜 그들에게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 요나는 이 일이 매우 못마땅하여, 화가 났다. 그는 주님께 기도하며 아뢰었다. “주님,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렇게 될 것이라고 이미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내가 서둘러 스페인을 달아났던 것도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좀처럼 노하지 않으시며 사랑이 한없는 분이셔서, 내리시려던 재앙마저 거두실 것임을 내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 이제는 제발 내 목숨을 나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하고 책망하셨다. 요나는 그 성읍을 빠져 나와 그 성읍 동쪽으로 가서 머물렀다. 그는 거기에다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다. 그 성읍이 어찌 되는가를 볼 셈이었다. 주 하나님이 박 넝쿨을 마련하셨다. 주님께서는, 그것이 자라올라 요나의 머리 위에 그늘이 지게 하여, 그를 편안하게 해주셨다. 박 넝쿨 때문에 요나는 기분이 무척 좋았다. 그러나 다음날 동이 틀 무렵, 하나님이 벌레를 한 마리 마련하셨는데, 그것이 박 넝쿨을 쏠아 버리니, 그 식물이 시들고 말았다. 해가 뜨자, 하나님이 찌는 듯이 뜨거운 동풍을 마련하셨다. 햇볕이 요나의 머리 위로 내리쬐니, 그는 기력을 잃고 죽기를 자청하면서 말하였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겠습니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말씀하셨다. “박 넝쿨이 죽었다고 네가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요나가 대답하였다. “옳다뿐이겠습니까? 저는 화가 나서 죽겠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수고하지도 않았고, 네가 키운 것도 아니며, 그저 하룻밤 사이에 자라났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식물을 네가 그처럼 아까워 하는데, 하물며 좌우를 가릴줄 모르는 사람들이 십이만 명도 더되고 짐승들도 수없이 많은 이 큰 성읍 니느웨를, 어찌 내가 아끼지 않겠느냐?”
사도행전 28:23-24, 30-31
그들은 바울과 만날 날짜를 정하였다. 그 날에 더 많은 사람이 바울의 숙소로 찾아왔다. 그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엄숙히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예언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관하여 그들을 설득하면서 그의 속내를 터놓았다. 더러는 그의 말을 받아들였으나, 더러는 믿지 않았다.
바울은 자기가 얻은 셋집에서 꼭 두 해 동안 지내면서, 자기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맞아들였다. 그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하게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일을 가르쳤다.
마가복음서 16:15-20
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나가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을 것이다.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표징들이 따를 터인데, 곧 그들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으로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들며, 독약을 마실지라도 절대로 해를 입지 않으며, 아픈 사람들에게 손을 얹으면 나을 것이다.” 주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뒤에, 하늘로 들려 올라가셔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으셨다. 그들은 나가서, 곳곳에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일하시고, 여러 가지 표징이 따르게 하셔서, 말씀을 확증하여 주셨다.
[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여라 ]
1. 끝에서 다시 시작되는 복음 선포
오늘 세 본문은 요나서와 사도행전과 마가복음서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각 성경의 마지막 장면들은 단지 이야기를 끝내는 장면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시 묻고, 다시 보내시는 자리입니다. 요나서는 “내가 어찌 니느웨를 아끼지 않겠느냐”라는 하나님의 질문으로 끝납니다. 사도행전은 바울 사도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모습으로 마무리됩니다. 마가복음서는 부활하신 주님의 명령으로 끝납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나가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여라.”
오늘 우리가 붙들어야 할 핵심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만민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복음을 만민에게 전하라고 보내십니다. 그리고 그 복음을 확증하시는 분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넓은 사랑을 마음에 품고, 문을 열고, 세상으로 들어가 담대하게 증언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바로 그 길로 우리를 이끌어 갑니다.
2. 하나님의 마음과 선포자의 마음
요나서 본문은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를 보신 하나님께서 심판의 뜻을 돌이키시고 재앙을 내리지 않으시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나쁜 길에서 돌이켰고, 하나님은 그 돌이킴을 보셨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이 일을 못마땅해하며 화를 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께 대들 듯이 기도합니다. “주님,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렇게 될 것이라고 이미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좀처럼 노하지 않으시며 사랑이 한없는 분이셔서, 내리시려던 재앙마저 거두실 것임을 내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나의 문제는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알고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 자비가 원수 같은 니느웨 사람들에게 임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입니다. 요나는 니느웨가 회개하고 살아나는 것을 기쁨으로 품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망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라고 말할 만큼 마음이 무너져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묻습니다.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그러나 그 질문 앞에서도 마음을 돌이키지 않습니다. 그는 성읍 동쪽에 초막을 짓고 앉아서, 니느웨가 어찌 되는지 지켜보려고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박 넝쿨을 마련하십니다. 그 박 넝쿨이 자라올라 요나의 머리 위에 그늘이 지게 하자, 요나는 기분이 무척 좋아집니다. 그러나 다음날 하나님이 마련하신 벌레가 박 넝쿨을 쏠아 버리니 식물이 시들어 버립니다. 뜨거운 동풍과 햇볕 아래에서 요나는 다시 죽기를 자청하며 말합니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겠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묻습니다. “박 넝쿨이 죽었다고 네가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요나는 대답합니다. “옳다뿐이겠습니까? 저는 화가 나서 죽겠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수고하지도 않았고, 네가 키운 것도 아니며, 그저 하룻밤 사이에 자라났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식물을 네가 그처럼 아까워 하는데, 하물며 좌우를 가릴 줄 모르는 사람들이 십이만 명도 더되고 짐승들도 수없이 많은 이 큰 성읍 니느웨를, 어찌 내가 아끼지 않겠느냐?”
이 질문으로 요나서는 끝납니다. 끝이지만, 하나님은 결말을 닫지 않으십니다. 질문을 남겨 두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다루시는 것은 니느웨만이 아니라 선포자인 요나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말을 전달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그 말이 가리키는 하나님의 마음을 함께 품는 일이기도 합니다. 내 마음이 좁고 옹졸하여 누군가의 회복을 기뻐하지 못한다면, 내 입술의 선포는 복음의 빛을 흐리게 만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니느웨를 사랑하시고, 그 성의 짐승들도 아끼시며, 동시에 요나도 붙드십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선포는 먼저 선포자가 하나님의 마음을 품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마음으로 지금까지 품지 못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3. 열려 있는 복음의 문
사도행전의 마지막 장면은 로마입니다. 바울 사도는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에 도착했지만, 그의 마음은 두려움에 갇히지 않았습니다. 그는 계획을 세워 사람들을 만났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숙소로 찾아왔습니다. 바울 사도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엄숙히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예언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설득하며 그의 속내를 터놓았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일어난 현실 그대로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더러는 그의 말을 받아들였으나, 더러는 믿지 않았다.”
복음을 전하면,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고,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선포자는 결과를 통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선포자는 증언의 자리를 끝까지 지킬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마지막까지 붙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기가 얻은 셋집에서 두 해 동안 지내면서, 자기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맞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하게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일을 가르쳤습니다. 사도행전의 마지막은 닫힌 문이 아니라 열린 문입니다.
로마는 당시 세계의 중심부였습니다. 복음은 변두리에만 머무르지 않고 중심으로 들어갑니다. 복음은 한 사람의 삶 한가운데로, 한 도시의 중심으로, 한 시대의 중심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 길이 저절로 열리지는 않습니다. 바울의 셋집이 보여 주듯이, 복음은 문을 여는 사람을 통해 들어갑니다. 찾아오는 사람을 환대하는 태도, 거절과 불신이 섞여 있어도 흔들리지 않는 담대함, 그리고 온종일 증언하는 성실함. 그 열린 집이 곧 복음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 복음과 교회는 어디에 놓여 있습니까?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나고 있지는 않습니까? 문화의 중심에서 외면받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람들의 마음 중심에서 뒤로 밀려나 있지 않습니까? 그럴수록 우리가 점검해야 할 것은 외부의 환경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문이 얼마나 열려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바울 사도는 문을 열어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 열린 문을 통해 로마 한복판에서도 복음은 막히지 않았고, 이어지는 여정 속에서 계속 열려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의 문은 누구에서, 어떤 방식으로 열려야 하는가?
4. 만민에게 표징을 드러내는 공동체
마가복음서의 마지막 장면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파송 명령을 내립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나가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을 것이다.” 복음 선포는 교회 울타리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세상 속으로 보내십니다. 그리고 그 길에서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의 사명은 모든 사람을 억지로 믿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표징들이 따를 터인데, 곧 그들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으로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들며, 독약을 마실지라도 절대로 해를 입지 않으며, 아픈 사람들에게 손을 얹으면 나을 것이다.” 믿는 사람들에게는 표징들이 따릅니다. 귀신을 쫓아내고, 새 방언으로 말하고, 손으로 뱀을 집으며, 독약을 마셔도 죽지 않고, 아픈 사람에게 손을 얹으면 낫는다는 표징입니다. 표징들은 선포자가 스스로 과시하기 위한 수단이나 도구가 아닙니다. 표징의 주체는 제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말씀을 확증하시는 분도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표징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명령에 따라 만민에게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 시대에 합당한 방식으로 말씀을 확증하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고대 사회에서의 표징이 있었듯이, 오늘 우리 시대에도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는 표징이 필요합니다. 특히, 다음 세대가 알아볼 수 있는 표징이 분명히 드러나야 할 때입니다. 그 표징은 단지 신비한 사건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삶 속에서 실현해 내는 공동체를 통해 드러날 수 있습니다. 마음의 문을 열고, 세상 한가운데로 들어가서, 사랑으로 섬기고 희생으로 이웃을 살리는 삶. 분열을 넘어 화해를 이루고, 절망 가운데 소망을 세우는 삶. 자기 의를 내려놓고 타자를 품는 넓은 사랑. 이러한 삶이야말로 오늘 우리가 보여 줄 수 있는 복음의 확증이며, 주님께서 함께 일하심을 드러내는 표징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표징의 출발점은 언제나 같습니다. 주님이 주신 명령에 대한 순종, 그리고 주님이 함께하신다는 믿음입니다.
우리 공동체는 다음 세대가 알아볼 표징을 어떻게 드러내고 있는가??
5. 만민을 향해 사랑과 희생으로
요나서는 우리를 향해 묻습니다. “내가 어찌 니느웨를 아끼지 않겠느냐?” 이 질문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마음을 다시 세웁니다. 사도행전은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자기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맞아들였다.” 복음은 열린 문을 통해 중심부로 들어갑니다. 마가복음서는 우리에게 명령합니다.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여라.” 그리고 그 길에서 말씀을 확증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요나서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으라고 하고, 사도행전은 복음의 문을 열라고 하고, 마가복음서는 만민에게 나아가라고 명령합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보내십니다. 니느웨 사람들도, 로마의 유대인과 이방인들도, 모두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도,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도, 나와 다른 언어와 문화와 세대 속에 있는 사람도,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 안에 있습니다. 복음 선포는 그 믿음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선포는 입술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문을 열고, 세상 안으로 들어가, 사랑과 희생으로 복음을 삶으로 보여 줄 때, 주님께서 말씀을 확증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표징을 욕망하며 앞서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걸어갈 때, 주님께서 우리 시대에 합당한 표징으로 복음을 증언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 길로 나아가는 사람마다 하나님 나라의 기쁨과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성찰) 지금 우리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가?
(응답) 사랑과 희생으로 복음을 확증하겠습니다!
함께 드리는 기도
만민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우리의 마음을 넓혀 주셔서, 주님의 긍휼을 품게 하여 주십시오. 우리 공동체의 문을 열어 찾아오는 이들을 맞아들이게 하시고, 세상으로 들어가 담대히 복음을 증언하게 하여 주십시오. 우리의 말과 삶을 통해 주님께서 함께 일하시고, 이 시대에 합당한 표징으로 복음을 확증하여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