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6월 14일 / 성령 강림 후 셋째 주일
스가랴서 8:18-23
만군의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넷째 달의 금식일과, 다섯째 달의 금식일과, 일곱째 달의 금식일과, 열째달의 금식일이 바뀌어서, 유다 백성에게 기쁘고 즐겁고 유쾌한 절기가 될 것이다. 너희는 마땅히 성실을 사랑하고, 평화를 사랑해야 한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이제 곧 세상 여러 나라에서 수많은 민족들과 주민들이 몰려 올 것이다. --- 그 때가 되면, 말이 다른 이방 사람 열 명이 유다 사람 하나의 옷자락을 붙잡고 ‘우리가 너와 함께 가겠다.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신다는 말을 들었다’ 하고 말할 것이다.”
사도행전 11:1-10
사도들과 유대에 있는 신도들이, 이방 사람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왔을 때에, 할례를 받은 사람들이 “당신은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의 집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은 사람이오” 하고 그를 나무랐다. 이에 베드로가 그 사이에 일어난 일을 차례대로 그들에게 설명하였다. --- ‘베드로야, 일어나서 잡아먹어라’ 하는 음성이 내게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나는 ‘주님,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나는 속된 것이나, 정결하지 않은 것을 먹은 일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아라’ 하는 음성이 두 번째로 하늘에서 들려왔습니다. 이런 일이 세 번 일어났습니다.
마가복음서 7:24-30
예수께서 거기에서 일어나셔서, 두로 지역으로 가셨다. --- 악한 귀신 들린 딸을 둔 여자가 곧바로 예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의 발 앞에 엎드렸다. 그 여자는 그리스 사람으로서, 시로페니키아 출생인데,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달라고 예수께 간청하였다.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자녀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나 그 여자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개들도 자녀들이 흘리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돌아가거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다.” 그 여자가 집에 돌아가서 보니, 아이는 침대에 누워 있고, 귀신은 이미 나가고 없었다.
[ 고통의 산을 넘어가는 사람들 ]
1. 고통을 넘어 생명의 확장으로
오늘은 성령 강림 후 셋째 주일입니다. 성령님께서는 믿음의 공동체가 세상으로 나아가 생명의 영역을 확장해 나가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성령의 역사는 교회가 머물러 있지 않고, 늘 경계를 넘어서도록 이끄십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고통의 산을 넘어가는 사람들입니다. 개인의 삶에도 넘어야 할 산이 있고,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도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 있습니다. 그 산은 단지 고난이나 어려움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좁게 만들고 공동체의 문을 닫게 만드는 상처와 두려움, 편견과 배제, 낡은 기준과 관습이 바로 그 산일 수 있습니다. 이 산을 넘어가는 일은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믿음의 공동체가 그 산 앞에서 멈추지 않고 넘어갈 수 있도록 성령으로 길을 여십니다.
오늘 세 본문은 슬픔의 금식이 기쁨의 절기로 바뀌고, 정결과 부정의 경계가 함께 먹는 식탁에서 무너지며, 부스러기 같은 은혜가 경계 바깥에 있는 사람들의 고통을 치유하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고통의 산을 두려워하지 않고, 생명의 영역을 확장해 가는 길로 나서게 될 것입니다.
2. 슬픔의 금식이 기쁨의 절기로
스가랴는 바빌로니아 포로 귀환 이후 시대의 예언자입니다. 귀환은 이루어졌지만, 사람들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낙심과 두려움이 공동체에 남아 있었고, 폐허의 흔적은 계속 눈앞에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스가랴 예언자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넷째 달의 금식일과, 다섯째 달의 금식일과, 일곱째 달의 금식일과, 열째달의 금식일이 바뀌어서, 유다 백성에게 기쁘고 즐겁고 유쾌한 절기가 될 것이다.” 이 네 번의 금식은 단순한 종교 행사가 아닙니다. 바빌로니아 제국의 침략으로 성전이 불타고 공동체가 짓밟힌 일의 기억과 연결된, 슬픔과 절망을 품고 살아온 공동체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슬픔의 시간을 기쁘고 유쾌한 절기로 바꾸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슬픔이 당장 사라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회복의 역사를 시작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회복의 역사는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땅히 성실을 사랑하고, 평화를 사랑해야 한다.” 슬픔에서 기쁨으로 바뀌는 것은 분위기만의 변화가 아닙니다. 공동체의 삶이 진실과 평화를 사랑하는 방향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성실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평화가 깨질 때, 공동체는 안에서부터 붕괴합니다. 그러므로 회복은 다시 진실해지는 것, 다시 평화를 선택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회복시키는 공동체는 욕망과 경쟁을 정당화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진실과 평화의 관계로 다시 세워지는 공동체입니다.
진실과 평화가 가득한 사랑의 공동체가 세워질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이제 곧 세상 여러 나라에서 수많은 민족들과 주민들이 몰려 올 것이다.” 멸망과 슬픔의 성이었던 예루살렘이, 모든 민족을 향해 열린 길이 됩니다. 심지어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이방 민족과 강대국들까지 만군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러 옵니다. 그리고 언어가 다른 이방 사람 열 명이 유다 사람 하나의 옷자락을 붙잡는 일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유다 사람 한 사람의 능력을 과시하는 장면이 아닙니다. 이방 사람들이 붙잡으려는 것은 인간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길입니다. 진실과 평화의 공동체가 세워질 때, 갈라져 살면서 서로 경쟁하고 미워하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중심으로 다시 연결됩니다.
생명의 확장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공동체의 슬픔을 성실과 평화를 통해 기쁨으로 변화시키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진실과 평화의 삶을 선택할 때, 절망과 슬픔의 성 예루살렘은 기쁨과 평화의 상징이 되고, 모든 민족을 향해 열린 성이 됩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공동체의 변화를 통해 온 세상으로 확장되어 갑니다.
(우리가 성실과 평화의 공동체로 변화될 때, 누구에게로 생명의 확장이 일어날까?)
3. 차별과 경계를 넘어 함께하는 식탁으로
하나님의 생명이 확장되는 과정에는 늘 넘어서야 할 산이 있습니다. 그 산은 공동체가 오랫동안 붙들어 온 경계의 울타리입니다. 사도행전 11장은 복음이 유대인에게서 세상 모든 사람에게로 확장되어 가는 과정에 겪어야 했던 진통을 보여 줍니다.
베드로는 욥바와 가이사랴의 고넬료 집에서 있었던 일을 통해, 이방 선교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과 그리스도인들은 이 변화와 새로운 깨달음을 아직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할례받은 사람들) 베드로를 비난했습니다. “당신은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의 집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은 사람이오” 갈등의 중심은 교리가 아니라 식탁이었습니다. 식탁은 공동체가 누구를 가족으로 받아들이는지 드러내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본 환상과 경험을 설명합니다.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이 내려오고, 그 안에는 유대 전통에서 정결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가득했습니다. ‘잡아먹어라’하는 음성이 들렸지만, 베드로는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하늘의 음성이 들립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아라”이 일이 세 번 반복되었다고 베드로는 말합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무너뜨린 것은 음식 규정만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붙들고 있던 경계의 선을 무너뜨린 것입니다. 유대 출신 그리스도인(할례받은 사람들) 중 일부는, 복음을 믿으면서도 유대인의 정결 규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정결 규정은 유대 전통과 문화로 고착되어 있었고,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 정결 규정을 지키기 위해서는 이방 사람들과 식탁을 함께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복음이 모든 경계와 금기를 무너뜨리고, 온 세상 모든 민족으로 확장되어 가는 과정에서 유대인의 정결 규정은 큰 걸림돌이 되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유대인으로서 경건하게 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 경건의 경계가 어느 순간 복음과 생명의 길을 좁히고, 복음의 확장을 막는 장벽이 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베드로가 지금까지 지켜 온 기준보다 더 근본적인 기준을 제시하십니다.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이 기준입니다. 교회는 바로 이 기준에 서 있을 때 확장됩니다. 교회가 스스로 정하고 지켜 온 기준과 경계에 머물러 있으면, 구원의 역사를 우리가 스스로 좁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새롭게 하시는 역사에 따라 식탁을 넓힐 때, 복음은 막히지 않고 확장될 것입니다. 성령님은 교회를 익숙하고 편한 상태에 머물게 하지 않습니다. 성령님은 낡은 틀을 깨트리며, 우리가 머물러 있지 않고, 늘 새로운 자리로 나아가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우리 공동체가 붙들고 있는 경계는 무엇인가? 그 경계를 넘어서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4. 부스러기 은혜의 확장
사도행전의 이야기가 공동체 내부의 진통을 보여 준다면, 복음서는 그 경계 밖에서 실제로 차별과 배제의 고통을 겪는 한 사람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 두로 지역으로 가셨을 때, 한 여인이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 여인은 그리스 사람으로 시로페니키아 출생입니다. 그리고 그의 딸은 귀신 들린 고통 속에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그 당시 상황에서 여러 겹의 차별과 배제로 고통을 겪는 사람입니다. 민족과 성별과 지역과 상황이 그렇습니다.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달라고 그 사람이 간청했을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자녀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이 말씀은, 차별과 배제를 정당화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당연하게 여겼던 차별과 배제의 경계를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이어지는 대화는 그 차별과 배제의 경계가 어떻게 무너지는지 보여 줍니다.
시로페니키아 여인은 물러서지 않고, 겸손하게 은혜를 기다리는 자세로 주님께 간청합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개들도 자녀들이 흘리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그는 어떤 권리나 공적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다만 겸손한 마음으로 은혜의 자리에 서 있을 뿐입니다. 은혜의 부스러기라도 얻기를 원하면서, 낙심하지 않는 인내와 믿음을 보여 줍니다. 그런 점에서 시로페니키아 여인은 기도의 모범이며 신앙의 모범입니다.
예수님의 거절은 그녀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지만,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은혜를 구했습니다. 응답 속에서 믿은 것이 아니라, 거절처럼 보이는 말 앞에서도 은혜를 붙들었습니다. 이 믿음이 그녀와 그녀의 귀신 들린 딸을 구원했습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돌아가거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다.”
치유는 이미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는 경계를 넘어 흘러갔습니다. 생명의 확장은 이렇게 이루어집니다. 부스러기처럼 보이는 은혜가 한 생명을 살리고, 그 한 생명의 회복을 통해 은혜가 경계 너머로 흐르는 길이 열립니다. 이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유대 민족주의의 울타리를 넘어서 온 세계 인류를 향해 나아갈 새 역사의 문이 열린 것입니다.
(거절 속에서도, 부스러기 은혜를 붙잡으며 기도할 때, 어떤 변화와 확장이 일어날까?)
5. 고통의 산을 넘어 생명의 확장으로
고통의 산을 넘어가는 것은, 낡은 기준을 내려놓고, 성실과 평화를 선택하고, 식탁을 넓히고, 경계 바깥에서 겪는 고통에 공감하며 과감히 문을 여는 것입니다. 공동체는 그렇게 확장됩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부스러기 같은 은혜라도 붙잡고 나아가, 생명의 역사를 확장해 나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성찰) 거절 속에서도 겸손하게 구하고 있는가?
(응답) 고통의 산을 넘어가겠습니다!
함께 드리는 기도
슬픔의 시간을 기쁨의 절기로 바꾸어 주시는 하나님, 우리 안에 있는 두려움과 낡은 기준이 만든 경계가 사라지게 해주십시오.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우리가 다시 차별하고 정죄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작은 은혜도 겸손히 붙들게 하시고, 고통의 산을 넘어 이웃과 세상을 향해 나아가게 해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