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3월 15일 / 사순절 넷째 주일
이사야서 59:1-3, 15(하)-20
주님의 손이 짧아서 구원하지 못하시는 것도 아니고, 주님의 귀가 어두워서 듣지 못하시는 것도 아니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의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의 죄 때문에 주님께서 너희에게서 얼굴을 돌리셔서, 너희의 말을 듣지 않으실 뿐이다. --- 주님께서 이것을 보셨다. 공평이 없는 것을 보시고 슬퍼하셨다. 압박받는 사람을 도우려는 사람이 없음을 보시고, 중재자가 없음을 보시고, 주님께서는 놀라셨다. 주님께서는 직접, 억압받는 사람들을 구원하시려고, 반드시 공의를 이루시려고, 당신의 능력을 친히 발휘하실 것이다. --- 원수가 강물처럼 몰려오겠으나, 주님의 영이 그들을 물리치실 것이다. 주님께서 시온의 속량자로 오시고, 야곱의 자손 가운데서 회개한 사람들에게 오신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디모데전서 1:12-17
나는 나에게 능력을 주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께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께서 나를 신실하게 여기셔서, 나에게 이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행동은 내가 믿지 않을 때에 알지 못하고 한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나에게 은혜를 넘치게 부어 주셔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얻는 믿음과 사랑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 나는 죄인의 우두머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 뜻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끝없이 참아 주심의 한 사례를 먼저 나에게서 드러내 보이심으로써, 앞으로 예수를 믿고 영생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본보기로 삼으시려는 것입니다. ---
요한복음서 19:1-12
--- 대제사장들과 경비병들이 예수를 보고 외쳤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그러자 빌라도는 그들에게 “당신들이 이 사람을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소.” 하고 말하였다. 유대 사람들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우리에게는 율법이 있는데 그 율법을 따르면 그는 마땅히 죽어야 합니다. 그가 자기를 가리켜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서 다시 관저 안으로 들어가서 예수께 물었다. “당신은 어디서 왔소?” 예수께서는 그에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빌라도가 예수께 말하였다. “나에게 말을 하지 않을 작정이오? 나에게는 당신을 놓아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처형할 권한도 있다는 것을 모르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위에서 주지 않으셨더라면, 당신에게는 나를 어찌할 아무런 권한도 없을 것이오. 그러므로 나를 당신에게 넘겨준 사람의 죄는 더 크다 할 것이오.” ---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얻는 믿음과 사랑 ]
1. 죄의 어둠 속에서 은총의 길로
오늘은 사순절 넷째 주일입니다. 오늘 세 본문은 인간의 깊은 어둠, 곧 악의 현실과 마주하게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악의 힘보다 더 크고 깊은 하나님 은총의 길이 어디에서 시작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악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끊는 힘이고, 은총은 그 끊어진 관계를 다시 이어주는 힘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악이 어떻게 우리를 무너뜨리는지, 은총이 어떻게 우리를 일으키는지, 그리고 예수님께서 악의 절정 속에서 어떻게 구원의 길을 여시는지를 새롭게 깨닫고, 주님과 함께 고난과 십자가를 넘어갈 수 있는 믿음과 용기를 얻게 될 것입니다.
2. 단절과 회복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이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던 예루살렘의 성전과 왕국이 파괴되는 참담한 일을 겪고, 절망과 충격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이 무너지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군사력의 부족이나 외교 정책의 실패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하나님이 무능하시거나, 이스라엘 백성을 외면하셨기 때문일까요? 이사야 예언자는 말합니다. “주님의 손이 짧아서 구원하지 못하시는 것도 아니고, 주님의 귀가 어두워서 듣지 못하시는 것도 아니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의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의 죄 때문에 주님께서 너희에게서 얼굴을 돌리셔서, 너희의 말을 듣지 않으실 뿐이다.” 예루살렘은 외부의 적 때문에 무너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단절의 결과로 공평이 사라지고, 정의가 무너지고, 공동체는 어둠 속에서 서로 상처를 입히며 무너지는 현실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사야의 진단은 오늘 우리에게도 깊고 심각한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흐려질 때, 삶의 중심이 흔들리거나 관계가 무너지거나 공평과 정의가 사라지는 일이 우리 안에도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말을 주고받으면서도 마음은 닫혀 있는 가정. 맡겨진 일은 충실히 해내면서도 영혼은 메말라가는 생활. 비교와 경쟁으로 신뢰가 무너지는 공동체. 이 모든 것은 죄로 인한 단절이 빚어내는 악의 현실입니다.
그렇다고 이사야가 절망적으로 예언의 말씀을 끝낸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사야는 말합니다. “주님께서 이것을 보셨다. 공평이 없는 것을 보시고 슬퍼하셨다. 압박받는 사람을 도우려는 사람이 없음을 보시고, 중재자가 없음을 보시고, 주님께서는 놀라셨다. 주님께서는 직접, 억압받는 사람들을 구원하시려고, 반드시 공의를 이루시려고, 당신의 능력을 친히 발휘하실 것이다.” 회복과 구원의 주도권은 사람에게 있지 않습니다. 강력한 지도자나 새로운 제도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진정한 회복은 언제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연결될 때 시작됩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과 공동체 안에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과 차별이나 억압 등의 문제들이 치유되는 길,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고 성실과 정직이 제자리를 찾는 길은 결국 죄인들이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데서 시작됩니다.
지금 어떤 단절을 경험하고 있는가?
내 삶과 공동체의 회복을 하나님께 맡기고 있는가?
3. 한계를 넘어서는 자비와 사랑
바울 사도는 자신의 과거를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습니다.” 이 말은 단지 바울 사도 개인의 실수나 죄에 대한 고백이 아니었습니다. 이 고백은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악의 경향성, 자기중심성, 부패성을 드러내는 보편적인 고백입니다. 그는 악을 행하면서도 스스로 그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우리 역시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자신의 한계를 보지 못하고, 죄의 본성을 가볍게 여기고, 내면의 어둠을 과소평가합니다. 이런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 분노가 습관이 되고, 타인을 판단하는 일이 자연스러워지고, 이기심이 합리화되고, 죄의 경향성이 성격이라는 명문으로 정당화됩니다. 그리고 그 어둠은 심지어 하나님의 은혜마저 오해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구원을 깊이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바울 사도의 고백에서 우리는 빛과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나에게 은혜를 넘치게 부어 주셔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얻는 믿음과 사랑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바울 사도의 변화는 인간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끝없이 참아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였고, 부족한 인간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체험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우리의 죄보다 크고,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모순과 한계를 넘어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바울을 바꾸셨고, 그를 복음의 도구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를 본보기로 삼아, 앞으로 예수를 믿고 영생을 얻으려는 모든 사람에게 생명의 빛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의 한계와 반복되는 죄, 우리가 안고 있는 깊은 모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악에 머무르는 이유는 악이 강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자기 한계를 넘어서는 힘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얻는 믿음과 사랑입니다.
나의 한계와 악의 경향성을 솔직히 인정하는가?
나를 향한 그리스도의 자비를 신뢰하는가?
4. 악의 절정에서 빛나는 침묵
오늘 복음서 본문은 악의 잔혹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장면을 보여 줍니다. 군인들은 조롱하면서 폭력을 즐기고, 종교 지도자들은 위선과 증오의 말을 내뱉고, 군중은 분노가 담긴 소리를 질러대고, 빌라도는 자신의 이해관계에 사로잡혀 계산하기에 바쁩니다. 인간의 악이 다양한 모습으로 드러나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그 한가운데에서 예수님은 침묵하십니다.
이 침묵은 포기의 침묵이 아니라 진리를 위한 침묵이며, 체념의 침묵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는 의지의 침묵이며, 메시아의 사명을 끝까지 완수하려는 결단의 침묵입니다. 동시에 그 침묵 안에는 배반한 제자들에 대한 슬픔, 불의한 재판을 바라보는 고통, 인간의 죄를 짊어진 메시아의 고뇌가 함께 담겨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악을 인정하는 패배의 침묵이 아니라, 악을 넘어서려는 의지가 담긴 사랑의 침묵이었습니다.
반면에, 빌라도는 두려움에 갇혀 흔들립니다. 그는 예수님께 죄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는 여러 번 예수님을 놓아주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두려움 때문에 그 기회를 살리지 못했습니다. 총독의 자리를 유지하려는 욕망, 로마 당국의 감시, 군중의 요구 등, 그에게 더 중요한 것은 진리가 아니라 이해관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진리가 아니라 안전한 선택을 합니다. 예수님을 놓아주려 했지만 결국 포기하고 맙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위에서 주지 않으셨더라면, 당신에게는 나를 어찌할 아무런 권한도 없었을 것이오.”
예수님은 진리의 길이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아셨으나, 그 길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불의 앞에서 진리를 말해야 할 순간에 침묵하고, 약자의 편에 서야 할 순간 외면하며, 손해가 두려워서 양심의 소리를 외면한다면, 우리는 빌라도와 같은 길 위에 서 있습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아직도 기회가 있다. 진리를 선택해라. 나와 함께 당당하게 나가자.’
진리의 길을 걸어가기 위해 무엇을 버려야 하는가?
무엇을 끝까지 붙들어야 하는가?
5.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얻는 믿음과 사랑
우리는 스스로 악을 이길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보다 더 큰 사랑으로 우리를 품어 주시고, 우리의 모든 실패보다 더 깊은 은혜로 우리를 감싸주십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우리를 단절에서 회복으로, 폭력에서 사랑으로, 악의 절정 속에서 빛나는 침묵의 길로 이끌어 주십니다. 죄는 우리를 끊어놓지만, 사랑은 다시 이어줍니다. 단절은 어둠을 만들지만, 믿음은 새로운 빛의 길을 엽니다. 우리가 악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믿음과 사랑뿐입니다.
(성찰)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는 가장 큰 죄악은 무엇인가?
(응답) 예수님과 함께 소명의 길을 걷겠습니다!
함께 드리는 기도
죄와 단절로 어둠 속에 머물던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음과 사랑의 길로 이끌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악의 소리보다 진리의 음성을 듣게 하시고, 두려움보다 용기로, 타협보다 순종으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선택과 삶을 통해 하나님의 정의와 구원이 드러나게 해주시고, 끝까지 주님의 길을 따르는 제자로 세워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