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 Document
Home회원가입로그인
수련원안내 기도동산 신학마당 신앙과 예술 성서와 말씀 수련숲 알림란
 
 


2025년 12월 7일 대림절 둘째주일

관리자 2025-11-30 (일) 21:40 9개월전 571  

2025년 12월 7일 / 대림절 둘째주일

스가랴서 2:1-2, 10-13

내가 고개를 들어 보니, 측량줄을 가진 사람이 하나 나타났다. 내가 그에게 물었다. “어디로 가십니까?” 그가 나에게 대답하였다. “예루살렘을 재서, 그 너비와 길이가 얼마나 되는지 알려고 간다.”

“도성 시온아, 기뻐하며 노래를 불러라. 내가 간다. 내가 네 안에 머무르면서 살겠다. 나 주의 말이다.” 그 날에, 많은 이방 백성들이 주님께 와서 그의 백성이 될 것이며,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머무르시면서, 너희와 함께 사실 것이다. 그때에야 너희는, 만군의 주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음을 알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 거룩한 땅에서 유다를 특별한 소유로 삼으실 것이며, 예루살렘을 가장 사랑하는 도성으로 선택하실 것이다. 육체를 지닌 모든 사람은 주님 앞에서 잠잠하여라. 주님께서 그 거룩한 거처에서 일어나셨다!

 

로마서 11:25-32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이 신비한 비밀을 알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스스로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 비밀은 이러합니다. 이방 사람의 수가 다 찰 때까지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서 일부가 완고해진 대로 있으리라는 것과,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습니다. “구원하시는 분이 시온에서 오실 것이니,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못함을 제거하실 것이다. 이것은 그들과 나 사이의 언약이니, 내가 그들의 죄를 없앨 때에 이루어질 것이다.” 복음의 관점에서 판단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러분이 잘 되라고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지만, 택하심을 받았다는 관점에서 판단하면, 그들은 조상 덕분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마운 선물과 부르심은 철회되지 않습니다. 전에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던 여러분이, 이제 이스라엘 사람의 불순종 때문에 하나님의 자비를 입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지금은 순종하지 않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도, 여러분이 받은 그 자비를 보고 회개하여, 마침내는 자비하심을 입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않는 상태에 가두신 것은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서 19:35-40

그리고 그들이 그 새끼 나귀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옷을 나귀 등에 걸쳐 얹고서, 예수를 올라타시게 하였다. 예수께서 나아가시는데, 제자들이 자기들의 옷을 길에 깔았다. 예수께서 어느덧 올리브 산의 내리막 길에 이르셨을 때에, 제자의 온 무리가 기뻐하며, 자기들이 본 모든 기적을 두고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말하였다.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임금님! 하늘에는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는 영광!” 그런데 무리 가운데 섞여 있는 바리새파 사람 몇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선생님의 제자들을 꾸짖으십시오.” 그러나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를 것이다.”

 

[평화의 일꾼]

1.

대림절은 기다림의 절기입니다. 그러나 이 기다림은 가만히 멈추어 서 있는 인내의 기다림이 아니라, 하나님의 평화를 위한 길을 분별하고 준비하는, 행동의 기다림입니다. 분열과 폭력, 무관심과 냉소가 점점 깊어지는 세상 속에서도, 우리는 주님의 평화가 임하는 길을 찾아 나섭니다. 대림절 둘째 주일의 촛불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평화의 일꾼으로 나설 준비가 되어 있는가?” 오늘 세 본문은 서로 다른 시간과 상황 속에서 같은 진리를 증언합니다. 평화는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며, 그 선물을 맡은 사람은 평화를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2.

스가랴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에게 회복과 기쁨과 평화를 선포한 예언자입니다. ‘내가 고개를 들어 보니, 측량줄을 가진 사람이 나타났다. --- 그가 대답하였다. “예루살렘을 재서, 그 너비와 길이가 얼마나 되는지 알려고 간다.”’(1-2절) 측량줄은 표면적으로는 심판을 떠올리게 하지만, 스가랴가 본 측량줄은 부족함을 드러내려는 도구가 아니라, 부족함을 채우려는 회복의 도구입니다. 하나님은 무너진 성을 측량하여 다시 세우려 하시며, 폐허가 된 예루살렘을 새로운 도성으로 일으키려 하십니다. 그러므로 측량줄은 두려움의 상징이 아니라 희망의 표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도성 시온아, 기뻐하며 노래를 불러라. --- 내가 네 안에 머무르면서 살겠다.’(10절)’ 하나님이 머무시는 곳은 곧 평화의 도성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면, 그곳은 안전과 기쁨의 자리이며, 폐허와 허무를 극복하고 새로 시작할 수 있는 희망의 자리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민족적 울타리를 지키는 배타적 도성이 아니라, 모든 이방 민족이 함께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열린 도성, 열린 하나님 나라의 중심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평화는 결코 어떤 울타리 안에 갇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제 역사 속에서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은 이 부르심에 온전히 응답하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측량줄은 오늘 우리에게도 드리워져 있습니다. 그 측량은 심판이 아니라 회복의 과정입니다. 드러내기 위한 심판이 아니라, 채우기 위한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 공동체에게 어떤 벽을 허물고 어떤 길을 열라고 하시는 걸까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채우고자 하시는 부족함은 무엇인가? 어떤 벽을 허물 때, 우리 안에 평화가 이루어질까?

 

3.

바울 사도는 로마 교회 안에 있는 갈등 앞에서 하나님의 신비한 비밀을 설명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이 신비한 비밀을 알기를 바랍니다.”(25절) 신비한 비밀은 알 수 없음을 말하는 불가지론이 아니라, 인간의 계산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구원 방식과 그 넘어섬 속에서 드러나는 하나님 자비의 깊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 “---그 비밀은 이러합니다. 이방 사람의 수가 다 찰 때까지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서 일부가 완고해진 대로 있으리라는 것과,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입니다.---”(25-26절) 이스라엘의 완고함(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인들이 많이 있다는 점)이 십자가 사건을 촉발했고, 그 십자가의 은혜는 이방인에게 흘러갔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의 충만함은 다시 이스라엘을 향해 들러 들어가서, 그들의 회복을 이끄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 이방인의 구원이 이스라엘을 향한 자비의 통로가 되고, 이스라엘의 완고함이 이방인을 향한 은혜의 통로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바울 사도가 말하는 신비한 비밀입니다.

 

이 신비 앞에서 모든 비교와 판단, 우열과 정죄는 힘을 잃습니다. 우리는 모두 완전하지 않은 질그릇이며, 모두 하나님의 자비 안에서만 온전히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 “복음의 관점에서 판단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러분이 잘되라고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지만, 택하심을 받았다는 관점에서 판단하면, 그들은 조상 덕분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마운 선물과 부르심은 철회되지 않습니다.”(28-29절) 이스라엘이 불신앙에 빠졌어도 하나님의 언약과 사랑은 철회되지 않습니다. 이방인의 구원도, 이스라엘의 회복도, 모두 하나님의 일방적이고 절대적인 자비에서 시작됩니다. 바울 사도는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않는 상태에 가두신 것은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려는 것입니다.”(32절) 여기에서 가두신다는 표현은 심판이 아니라, 결국 자비로 되돌아오게 하는 하나님의 강력한 배려입니다. 자비를 경험한 사람은 교만할 수 없으며, 자비를 입은 공동체는 분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모든 평화의 뿌리이며, 자비를 받은 사람은 평화의 일꾼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교만으로 바꾸지 않기 위해 내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갈등을 넘어 평화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 공동체가 감당해야 할 사명은?

 

4.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제자들은 환호하며 외쳤습니다.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임금님! 하늘에는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는 영광!”(38절) 그들의 환호는 기쁨의 표현이었지만, 그 환호 속에는 오해가 섞여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로마의 권력을 무너뜨리고 이스라엘을 회복할 정치적 메시아로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그 환호가 로마제국을 자극할 위험한 행동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어느 쪽의 기대나 생각에도 따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전쟁과 힘을 상징하는 말이 아니라, 새끼 나귀를 타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평화는 힘의 평화가 아니라 사랑의 평화이며, 지배의 평화가 아니라 섬김의 평화이고, 폭력의 평화가 아니라 십자가로 드러난 화해의 평화입니다. 평화의 임금은 무력으로 오지 않고, 십자가의 희생으로 오십니다. 예수님의 평화는 강한 자의 평화가 아니라, 사랑으로 자기를 내어주는 낮추는 자의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제자를 꾸짖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다.”(40절) 진리는 감출 수 없으며,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는 어떤 억압도 막을 수 없다는 선언입니다. 예수님의 길은 영광으로 향하는 길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과하여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힘으로 세상을 바꾸려 하지 않으시고, 사랑으로 세상과 하나님을 화해시키셨습니다. 오늘도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시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힘이 아니라 사랑으로 가라.”

 

평화를 위해 오늘 내가 기꺼이 감당해야 할 희생은 무엇인가?

 

5.

하나님의 측량줄은 우리의 부족함을 드러내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회복시키시려는 은혜의 손길입니다. 우리의 부족함을 채우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은 새끼 나귀를 타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오셨고, 평화의 왕은 우리에게 죄의 용서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선물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평화를 이 세상으로 흘려보내는 사람이며, 벽을 세우는 사람이 아니라 울타리를 허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판단의 언어 대신 자비의 언어를 선택하고, 정의와 사랑을 대립시키지 않고 하나로 품으며, 겸손과 순종과 자기희생으로 주님의 길을 따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예수님의 방식으로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한 사람으로서 자비를 흘려보내는 사람, 그가 바로 평화의 일꾼입니다.

 

(성찰) 갈등과 대립을 넘어서기 위해 어떻게 노력하고 있는가?

(응답) 평화의 일꾼이 되겠습니다!

 

함께 드리는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무너진 세상 속에서도 평화를 꿈꾸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스가랴처럼, 하나님이 머무실 자리를 준비하게 하시고, 자비와 은혜의 복음이 우리 안에 충만하게 역사하게 해주십시오. 우리의 마음이 판단보다 자비로, 미움보다 사랑으로 채워지게 하시고, 새끼 나귀를 타신 예수님처럼 권력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을 택하여 평화의 일꾼으로 살게 해주십시오.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hi
이전글  다음글  목록 글쓰기



copyr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