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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끼 나귀가 들려주는 종려주일 설교

관리자 2016-03-16 (수) 09:49 10년전 4582  

(‘삼위일체력’의 ‘주일성서일과’에 따른 것입니다. 삼위일체력은 신학마당 1번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새끼 나귀가 설교하다

스가랴서9:9-12. 빌립보서2:1-11. 요한복음서12:12-19

 

종려주일 2013. 3. 20.

 

*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이란 이름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한데서 유래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본격 십자가 고난의 길에 접어드셨습니다.

오늘 봉독한 요한복음서의 종려주일 본문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장면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이 예루살렘 입성을 히브리 성서가 꿈꾸고 예언한 메시아의 예루살렘 입성 실현으로 이해하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신약성서는 히브리 성서의 스가랴 예언자의 예언을 인용하며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그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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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랴는 예루살렘을 딸이라고 부르며, 딸 예루살렘에게 기뻐하며 환성을 지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메시아가 오시기 때문입니다. 이 의롭고 승리를 이루어 주실 메시아는 어떤 차림과 행차로 오실까? 스가랴는 “그분은 겸손하시어 나귀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셔서 모든 전쟁 무기를 폐기하시고 온 누리에 평화를 선포하실 것이라고 전해줍니다.

‘승리를 가져오는 임금이 군마가 아니라 새끼 나귀를 타고 온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딸로 부른다’하는 표현들을 통해서 히브리 성서가 궁극에 꿈꾼 메시아의 정체가 분명해집니다. 군마를 탄 임금은 정복자, 파괴자, 억압자입니다. 침략해서, 남자들을 죽이고, 재산을 빼앗고, 여자들을 겁탈하고, 아이들을 잡아갑니다. 이 때문에 여자들과 아이들은 누가 되었든 군마 탄 사람만 보면 불안하고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한국전쟁 때 소련군과 중공군이 들어와서 똑같은 짓을 했습니다. 월남전 때 한국군이 베트남에 가서 똑같은 짓을 저질렀습니다. 미군도 이라크에 가서 똑같은 짓 했습니다. 그것도 정의와 자유의 이름으로 말입니다. 이것은 모든 시대에서 군마를 탄자들의 한결같은 짓거리입니다.

 

아니다! 하나님의 메시아는 군마 타고 창칼 가지고 있지 않다. 군사력, 미사일, 유도탄 가지지 않는다. 정복, 지배, 침탈이 아니다. 하나님의 메시아는 새끼나귀 타고 와서, 자기 몸과 삶을 바쳐 겸손하게, 사람들을 섬기는 분이다. 그래서 다만 평화를 만드는 분이다.

 

이 스가랴의 메시아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네 복음서는 한결같이 입을 모읍니다. 역사적으로 예수께서 실제로 새끼 나귀를 타고 온 민중들의 환호를 열렬히 받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이 예루살렘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신 나사렛 예수의 삶과 가르침과 죽음 안에서, 스가랴가 예언한 그 메시아를 보고 고백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역사적 사실입니다.

스가랴는 임금이 겸손해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온다고 했는데, 요한복음서는 ‘겸손하셔서’란 말을 뺀 채, 그냥 너의 임금이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러나 새끼나귀는 평화의 상징과 함께 겸손을 뜻하기 때문에 오늘 성서일과의 서신서 본문은 그리스도의 낮아짐의 교리를 함께 묵상하도록 짝 지워 주었습니다.

빌립보서 2장 6절부터 11절은 초대교회의 교리입니다. 그러나 ‘사도신조’와 ‘니케아신조’ 같은 성격의 교리라기보다는 예배 시간에 찬양으로 부른 신앙고백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찬가’라는 이름이 붙여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찬가에 나타난 그리스도를 “케노시스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7절에 “그리스도는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셨다.”고 하는데, 여기서 ‘비우다’하는 동사는 ‘타이페노스’라고 하는 헬라어에서 왔습니다. ‘비천하다. 초라하다. 하층이다. 겸손하다. 온유하다’와 같은 뜻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성육신을 통해서 비천해지고, 겸손해지시고, 낮아지는 이것을 그리스도교 교리역사에서는 ‘케노시스’라고 합니다. 이 케노시스는 겸손과 낮아짐과 더불어 자기를 비워내고, 아무것도 아닌 ‘공’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낮아지시고, 겸손하셨을 뿐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서 자기를 다 내어줌으로 빈 존재, 공의 존재가 되셨습니다. 현대에 들어와서 일본의 ‘교토학파’라고 하는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은 이 케노시스 그리스도론이라는 신학과 철학을 가지고 불교의 공의 사상과 대화를 하는 큰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새끼나귀, 그리고 새끼나귀를 타고오시는 메시아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절로 이런 말씀을 깨닫게 합니다. “겸손은 자기를 낮추는 행위이다. 이 겸손은 십자가에서 자기를 다 내어주고 해체하는 ‘공’의 행위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섬기고 사람들을 섬기는 순종의 행위이다. 이 행위를 통해서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평화가 이루어진다.” ‘겸손-낮아짐-십자가의 헌신-평화’ 이것이 새끼나귀를 타고 오시는 메시아의 이미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가, 이 나라가, 온 인류와 생명계가 ‘겸손-낮아짐-십자가 사랑’을 표상하는 새끼나귀의 의미를 깨달을 때, 우리는 진정한 평화를 누리며, 기쁨과 환호의 축제장을 만들게 됩니다.

이 때문에 한 주간 새끼나귀를 집중해서 묵상했습니다. 새끼나귀가 이 평화의 메시아를 운반하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새끼나귀는 군마와 대조되면서 겸손과 평화의 뜻을 부각시키기 때문입니다.

 

16세기 초 예수회를 창설한 이나시요 로욜라는 독특한 관상법을 개발했습니다. 상상력을 동원해서 성서의 한 장면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한 주간 상상력으로 오늘 예수님을 태운 새끼나귀가 되어 보았습니다.

함께 새끼나귀가 들려주는 종려주일 말씀을 들어봅시다.

 

“나는 아직도 엄마나귀에게서 떨어질 줄 모르는 새끼 나귀랍니다. 오늘은 참 재수 없는 날이에요. 글쎄, 어떤 남루한 사람이 나를 보더니, 무조건 올라타는 것 아니겠어요? 나는 아직 새끼라고요. 등에다 무얼 질 수 있는 때가 안 되었다고요.

글쎄 이 아저씨는 무거워서 비틀거리는 나를 아랑곳 하지 않고, 마구 앞으로 가려고 해요. 나는 물론 안 가려고 버티면서, 이 아저씨가 내려오기를 바랐지요. 그랬더니, 곁에 있는 힘센 다른 아저씨들이 나를 끌고 가는 거예요. 그래서 억지로 거지 행색의 아저씨를 태운 채, 나는 성안으로 들어가야 했어요. 새끼나귀인 나는 너무 무겁고, 소란스러워서 죽을 것만 같았어요.

그런데 수도 없는 사람들이 만세를 부르며, 임금님, 임금님, 평화의 임금님을 외치며 나뭇가지를 흔드는 거예요. 왜 그럴까? 그때 우리 엄마가 내 곁으로 왔어요. 엄마는 귓속말로 ‘장하다! 내 새끼!’하면서 나를 마구 칭찬하고, 자랑하는 거예요. (엄마나귀는 제가 꾸민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서는 사람들이 암나귀와 어린나귀를 끌고 왔다고 합니다.)

오 내 아기! 네 등에 탄분이 바로 온 생명들이 기다리던 하나님의 메시아란다. 옛 예언자가 예언했던 그분이란다. 그분이 새끼나귀를 타고 오신다고 했는데, 바로 네가 그 새끼나귀로구나!

우리 엄만 세상에서 제일 지혜로워요. 제가 태어난 그 시간부터, 언제나 제게 성경을 읽어주고, 하루 세 번씩 기도해 주었죠. 성경말씀을 듣고 들으며, 어린 저는 일찍 하나님이 내신 이 세계의 신비를 깨쳤지요. 다른 지식을 달달 외운 친구 나귀들과는 달라요. 그리고 엄마와 함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지혜를 받았지요. 이렇게 해서 순진하고 순수한 아기 마음으로 나는 역사와 자연의 이치를 깨쳤답니다.

엄마가 ‘네가 메시아를 등에 태운 새끼나귀다.’ 했을 때, 나는 알았답니다. 그래요.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생명은 새끼나귀랍니다. 그 누구든 연약하지만 자기 등에 무거운 짐을 이어야 하지요. 오늘 내 등에 타신 그분이야말로 하나님의 새끼나귀세요. 틀림없이 그분은 자기 등에 엄청난 짐, 임금님의 짐, 메시아의 짐을 지실 거예요. 얼마나 힘들고 무서우실까? 겸손이란 바로 남 위에 올라타는 것이 아니라 나처럼, 그분처럼 자기 등에 남을 태우는 것이랍니다.

내 등에 타신 그분은 그리스도, 메시아세요. 참사람이지요. 사람이 누굴까요? 당나귀인 내가 사람을 설명해볼께요. 살다, 사람, 그리고 사람의 몸을 구성하는 살은, ‘사르다’란 말에서 왔대요. 불사르는 거예요. 무엇인가를, 누군가를 위해서 뜨겁게 자기를 불사르는 거예요. 뜨겁게 불사를 때, 이 때 사람이고, 이 때 살아있는 거예요. 무엇을 위해 삶을 불사를까요? 이것도 오늘 깨달았아요. 내 등에 무겁게 이은 그것을 위해 생명을 불사르는 거예요.

이제 나는 내 등에 이은 그분을 위해 나를 불사를거예요. 오늘 내 말을 듣는 당신의 어깨와 등에 있는 그 무거운 것은 무엇인가요? 아픈 가족인가요? 이 겨레인가요? 당신이 등에 질 그것은 결코 짐이 아니랍니다. 당신을 불사를 고귀한 대상입니다. 당신 등의 그 무거운 것을 위해 당신을 불살라 당신을 비울 때, 당신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랍니다. 당신은 다시 높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들림받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진리생명으로 가득하게 되지요.

새끼나귀인 나와 내 위에 타신 그분처럼, 모든 생명이 ‘겸손-낮아짐-십자가의 불사름의 삶을 살 때, 이 땅의 모든 군마는 사라지고, 하나님의 평화가 온 누리에 넘친답니다.

아, 나는 행복하고, 자랑스럽습니다. 새끼나귀이니까요. 내 등에 그분을 이었으니까요. 그래서 나는 뻐기며, 그분을 태우고 성안으로 들어갔답니다.”

 

***

새끼나귀가 들려준 이 깨달음의 선포를 통해서 성삼위 하나님께 끝없는 영광과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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