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통한 생명
신명기서6:1-15(1-9). 요한일서3:11-24(16-24). 요한복음서13:31-35
사순절 다섯째 주일 2016. 3.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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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 중 요맘때면, 아주 깊은 감동을 받습니다. 그러면서 불끈 힘을 내봅니다. 조금만 아스팔트와 시멘트를 벗어나 보세요. 여기저기서 무슨 풀인지는 모르지만 푸른 싹들이 마구 솟아오르고 있습니다.
이 싹들이 겨울동안 씨알로 있었는지, 뿌리로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씨알이라고 하지요. 이 솟아오르는 푸른 싹은 두 가지 요소가 결합되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앎과 행동입니다. 물론 씨알의 앎은 우리 사람처럼 이성적인 그런 앎은 아니겠지요. 그러나 씨알은 절로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는 것을 압니다. 땅의 온도나 습기 등등으로,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씨알 스스로 움틀 봄이 온 것을 감지하는 것이죠. 씨알은 이 아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행동합니다. 자기 안에서부터 힘차게 껍질을 뚫고 솟구칩니다. 자기 껍질을 뚫는 것은 쉬워요. 절로 됩니다. 그러나 위의 두터운 흙, 아직도 딱딱하거나, 습기로 뭉쳐진 흙을 뚫고 나오는 일은 몹시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봄이 왔으며, 생명을 내놓을 때가 된 것을 아는 씨알은 힘차게 행동해서 싹을 냅니다. 보십시오. 논밭에 나가면, 벌써 봄나물이 지천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영성생활도 이와 같습니다. 이번 사순절 동안 저도 저 자신의 깊은 내면을 전통적인 여덟 가지 대죄-(에바그리우스가 지적한 악마같은 것으로)탐식, 사치, 돈 사랑, 슬픔, 화냄, 게으름, 허영, 오만-를 묵상하며 되돌아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이미 교만에 빠져 들어간 저의 심각한 사태를 알았습니다. 이 앎으로만 그친다면, 저는 발전이 없습니다. 내 인격과 삶이 싹이 나고 잎이 나고 열매내듯 자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 나의 위기를 알았다면 행동해야 합니다. 교만이라는 문제를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교만에서 벗어나 힘차게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그것이 행동입니다. 한 주간 허영과 교만을 좀 분석적인 차원에서 묵상했습니다. 그러면서 지난 주간은 허영과 교만의 긍정적인 차원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허영은 자기를 부풀려 보이려는 욕구입니다. 그리고 교만은 ‘내가 척도다’하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런 허영과 교만은 그 심리학적인 기원이 있다고 합니다. 아기가 태어나면, 이 아기는 어느 순간쯤에, ‘전능감’을 갖는다고 합니다. 석가모니께서 태어나자마자 걸음을 떼며 ‘천상천하유아독존’하신 것처럼, 자기를 마치 신 인양, 전능자인양 여긴다는 것입니다. ‘내가 세계 최고다. 나는 뭐든 다 한다’하는 자존감, 자긍감입니다.
이럴 때 엄마는 “그래, 네가 최고다. 네가 제일 멋있다.”하고 맞장구를 쳐주면서 아기의 전능감을 북돋아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아기는 자기에 대한 자긍심과 자부심을 가지고 이 세계 안에서 자기만의 생을 펼쳐가는 힘을 얻습니다. 바로 여기에서부터 허영과 교만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허영과 교만은 나쁜 것만은 아니고 창조적인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어떤 엄마들은 아기의 전능감을 무시합니다. 받아주고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그러면 아기는 그 무의식에 ‘나는 모자라구나, 나는 엄마와 사람들에게 보여줄 것이 하나도 없구나’하는 감정을 갖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늘 자신감을 잃고, 자기를 부족하게 여기게 됩니다. 자기에 대한 신뢰나 사랑이 없게 됩니다. 남에게 잘 보이려는 허영과 교만이 형성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보면 매사에 주눅이 들고, 눈치를 보고, 자기보다 잘 난 사람들에게 평생 자기 인생을 맞추어 가며 살아갑니다.
한 주간 제 깊은 속에 있는 허영과 교만을 행동의 차원에서 분석하고 묵상했습니다. 저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마찬가지입니다. 나와 여러분 모두는 허영과 교만이 있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께, 교우 여러분께, 또 우리 동역자들에게 나를 잘 보이고 싶습니다.
다만 이런 허영과 교만이 말 그대로, 허세가 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의 허영과 교만에 맞게 성실히 내적인 힘과 자질을 쌓는 것이 무척 중요합니다. 허영과 교만은 우리를 노력하게 하고 성장하게 하는 추진력이요, 충동입니다. 이 교만을 통해서 자존감을 가지면서도, 겸손히 마음을 열고 다른 것을 받아들이고, 동시에 부족함을 느끼며 열심히 배우는 삶을 겸비하면, 이런 교만은 우리에게 아주 창조적인 요소가 될 것입니다. 겸손한 교만이라고 할까요?
예수님을 보세요. 교만과 겸손이 예수님의 인격과 삶에서 아주 멋진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아무도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 이르지 못한다.” 하셨습니다. 큰 교만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님은 가장 약한 존재가 되어서 하나님께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하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교만과 겸손, 그리고 십자가라고 하는 성실한 행동! 이를 통해 하나님은 예수를 내 사랑하는 아들! 하시면서 온 만물을 다스리는 분으로 높이 들어 올리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사순절이나 생의 중요한 전환시기마다 끊임없이 자기의 죄를 발견하고 눈물로 참회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자기의 죄, 부족, 한계, 연약함, 욕망을 통감하고 뉘우침으로 정화가 일어납니다. 말 그대로 심령이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깨끗한 마음이 되면 비로소 그 사람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또 깨끗한 마음이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의 영혼 안으로 들어오실 수가 있습니다.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고, 깨끗한 마음 안으로 하나님이 들어오시는 것, 이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깨끗한 마음이 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진실한 사랑의 힘을 회복합니다.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서로를 향해 가는 것, 그리하여 하나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과 하나 되는 기도를 우리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는 늘 혼인으로, 사랑으로 경험하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제든 교회를 순결한 신부로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신앙은 늘 사랑의 혼인잔치가 열리는 축제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탐식, 음욕 또는 돈사랑, 사치, 성냄, 슬픔, 게으름, 허영, 교만이라는 이 근본 죄들은 깊이 묵상하고, 자신 안에서 이 죄들을 찾아내고 슬퍼하는 참회를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사랑할 때가 절로 되었습니다. 이 정화된 마음, 곧 깨끗한 마음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하나님을 향합니다. 팔복은 알려줍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지극한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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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참회의 절기를 서서히 마무리하는 사순절 다섯째 주일입니다. 성서일과는 때맞추어 바로 사랑의 문제를 전해줍니다. 신명기서 본문은 히브리 성서 전체를 요약한 말씀입니다. 히브리 성서를 한 장으로 줄이면 십계명이고, 그것을 몇 줄로 줄이면, 바로 ‘쉐마’입니다. “들으라. - 쉐마” “주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오, 주님은 오직 한분뿐입니다. 당신들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이 ‘사랑’이 ‘계명’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서 13장에서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계명을 내려주십니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그냥 계명이 아니라 요한사도는 새 계명이란 말을 썼습니다. 한 신약성서 주해의 해설을 보면(가톨릭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예수님의 사랑은 사랑을 실천하는 새로운 방식을 시사하기 때문에 새 계명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 요한복음서는 모세의 계명, 곧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계명을 염두에 두고 새 계명이란 말을 썼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요한공동체에 주신 새 계명 또한 사랑의 계명입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그리고 이 새 계명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요한일서에서 밝혀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내려주신 실천 계명인 사랑에 대해서 요한 사도는 “여러분, 우리는 말이나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과 진실함으로 사랑합시다.” 하고 전해줍니다.
성서는 놀랍고도 위대합니다. 인간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계명, 곧 우주적인 계율이요 지침을 ‘사랑’으로 내려주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오늘 요한 사도가 같은 사랑의 계명을 “새 계명”이라고 했기 때문에 모세를 통해 주어진 계명과, 요한을 통해 주어진 그리스도의 계명을 대조하면서 더 깊이 묵상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새 계명의 그 깊은 우주적 차원을 만나보고자 합니다.
먼저 히브리 성서도 신약도 계명의 근본을 법조문으로 이해하지 않고, 생명과 복을 누리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은총의 선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계명의 정신과 목적은 사랑에 있습니다. 때문에 성서와 그리스도교의 모든 것은 법이 아니라, 다만 사랑의 관점에서만 해석하고 적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랑의 계명이 히브리 성서와 공관복음서, 그리고 오늘 요한복음서에서 다르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먼저 히브리 성서에 따르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따로 떨어져서 주어지고 있습니다. 봉독한 신명기서 6장에서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레위기 19장 18절에 “너는 너의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여라.”하는 이웃 사랑의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붙어있지 않고 떨어져 있습니다. 때문에 훗날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별개로 알거나, 하나님 사랑은 으뜸이고 이웃사랑은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 예가 ‘고르반’입니다. 계명을 잘 지키는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이 자기 부모에게 드릴 것을 부모에게 드리는 대신에, 하나님께 바치며 하나님께 바쳤으니 더 잘 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의 계명일까요? 이 때문에 공관복음서에 가면 예수님은 이 분리된 사랑의 계명을 바로 잡으십니다. 이 문제는 너무나 중요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사항이기 때문에 마태, 마가, 누가 세 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마22:34-40. 막12:28-34. 눅10:25-28) 세 복음서가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종합하면 이렇습니다. 모든 계명 중에 으뜸계명이 무엇입니까? 하고 묻는 어느 율법학자의 질문에 예수님은 첫째는 하나님 사랑이고, 둘째는 이웃사랑이다 하고 대답하십니다. 공관복음서는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을 함께 연결 지었습니다.
특히 누가복음서 10장 27절에서 37절이 이것을 잘 보여줍니다. “...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또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사랑, 둘째는 이웃사랑이라고 하지 않고 누가는 ‘and-그리고’라고 하는 나란한 것을 잇는 접속사를 썼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라.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은 붙어있을 뿐 아니라, 나란한 계명입니다. 그러면서 누가복음서는 바로 이어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려줍니다. 곤경에 처한 이웃을 사랑하는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서, 이웃사랑 계명이 결코 하나님사랑 계명에 대해서 이차적인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그리스도교는 하나님 사랑을 위해서, 이웃에게 베풀 사랑을 가로채지 않습니다. 연로한 부모에게 드릴 용돈